공연
[마이데일리 = 허설희 기자] 뮤지컬배우 전나영(26)은 누가 봐도, 언제든, 어디에서든 예술가다. 타고난 끼는 굳이 표출하지 않아도 느껴진다. 그렇다고 과하지도 않다. 적절한 선에서 자신의 예술 혼을 항상 불태운다.
어린 시절부터 그 예술성은 눈에 띄었다. 네덜란드 교포3세인 전나영의 끼를 먼저 알아본 것은 할아버지와 할머니. 이후엔 친한 친구가 그를 뮤지컬의 길로 이끌었다. 어린 시절부터 예술 분야에 두각을 드러낸 만큼 전나영의 예술 인생은 일찍 시작됐다.
현재 뮤지컬 '레미제라블'에서 판틴 역을 맡아 한국 관객들을 처음 만나고 있는 전나영은 22살에 네덜란드 '미스사이공'(2011-12년)에서 킴 역을 맡았다. 영국 웨스트엔드에서 30년간 공연되고 있는 뮤지컬 '레미제라블'(2013-14년)에서 동양인 최초로 판틴 역을 맡아 활약했고, 2015년 한국 무대에 올랐다.
뮤지컬 '레미제라블'은 기구한 운명의 청년 장발장의 숭고한 인간애와 박애정신, 인간의 원초적이고 아름다운 삶의 이야기를 그린다. 극중 전나영이 연기하는 판틴은 비극적인 삶을 살지만 가혹한 현실 속에서도 끝까지 꿈과 희망을 이야기하는 인물이다.
대구 공연에 이어 서울 공연을 시작한 전나영은 어느 정도 한국에 적응했다. 따뜻한 정이 있는 한국 사람들에게 진짜 가족 같은 느낌을 받았고, 반년 가까이 한국에서 지내면서 문화를 이해하고 있다.
"한국은 정이 있어요. 한국 말을 하지만 한국 문화는 어른들에게만 배울 수 있었어요. 제가 딸이었고 손녀였기 때문에 또래에게 한국 문화를 배울 기회가 없었죠. '내가 집이 아닌 한국에서도 자유롭게 할 수 있을까' 궁금했어요. 지금은 친구들도 많이 사귀게 됐고, 동료들과도 친해져서 너무 좋아요."
전나영은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생활했지만 한국 생활엔 무리가 없다. 어린 시절부터 조부모와 부모에게 한국어를 배웠고, 한국 문화에 대한 끊임 없는 호기심이 있었기 때문에 의사소통과 한국인의 정서를 공감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다.
물론 한국 무대에 처음 서게 되면서 부담감은 있긴 했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의 고향 무대라는 점에서 오는 책임감 때문이다. 전나영은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진짜 이 순간을 기도하고 오신 것 같다"고 밝혔다.
그는 "어릴 때부터 할머니, 할아버지가 '한국어를 잘 해야 한다'며 한글 공부를 많이 시켰다"며 "내 음악성을 처음 보고 연습시킨 것도 할머니, 할아버지다"고 말했다.
"사실 할아버지께서 제가 대구 첫 공연 하는 그 날, 처음 한국 무대에 서는 그 날 돌아가셨어요. 오랫동안 편찮으셨거든요. 공연 끝나고 알았어요. 엄마, 아빠가 공연 보러 오셨는데 끝나고나서 말해주시더라고요. 진짜 아름다운 인생을 사셨고, 엄청난 사랑을 모두에게 주고 가셨어요. 저를 열심히 키워 주시고 열정을 주셨는데 제가 할아버지의 고향인 한국에서 처음 관객 앞에 서는 날 돌아가셨으니 저한테는 의미가 있었어요. 그날까지 저를 지켜보고 가신거고, 가도 되겠다고 느껴져서 가신 거라 생각해요. 할아버지 영혼이 그 관객석에 있었다고 생각해요."
전나영이 예술가의 길을 갈 수 있는데는 조부모의 역할이 컸다. 어린 시절 작은 피아노를 치며 작곡하는 손녀를 보고 예술성을 단번에 알아챈 그의 조부모는 적극적으로 전나영의 예술 활동을 지원했다. 오히려 부모님은 딸을 평범하게 키우려 했지만 조부모는 "나영이는 예술 쪽으로 가야 한다"고 완강한 입장을 보였다.
"전 진짜 행운이었죠. 처음에는 싱어송라이터가 되고 싶었어요. 나의 음악을 만들고 나의 작품을 작업하고 싶었거든요. 사실 요즘 열한살 때 쓴 곡 들으면서 '와. 내가 열한살 때 벌써 그런 감정과 음악성을 갖고 음악으로 그 감정을 전달할 수 있었구나' 싶어요. 그런 부분을 발견해준 할머니, 할아버지께 감사하죠."
처음 그녀의 예술성을 발견한 이들이 조부모였다면 뮤지컬의 길로 들어서게 해준 것은 친한 친구였다. 퍼포먼스 아트를 공부하던 전나영은 어린 나이로 인해 경험과 철학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좀 더 다양한 분야를 전문적으로 배우고 싶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춤, 연기, 노래를 구체적으로 배우고 싶어 로테르담 예술학교에 가게 됐다.
"저절로 뭔가가 나오길 바랐는데 그건 내가 고민해서 해결될 게 아니더라고요. 학교에서 구체적으로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죠. 학교에 들어간 뒤 1년 공부했는데 친구가 '타잔' 오디션을 보자고 했어요. 농담처럼 신청하게 돼서 가게 됐는데 재밌더라고요. 그런데 눈 깜빡 하니까 제가 제인 역 파이널 오디션에 들어가 있는 거예요. '와, 그럴 수 있구나' 신기했죠. 그 때 제인은 안 됐는데 연출님이 '하이스쿨 뮤지컬' 캐시 역 오디션을 제안했어요. 근데 캐시 역이 됐죠. 그 때부터 고민을 많이 했어요."
사실 전나영은 뮤지컬배우를 꿈꾼 것은 아니기 때문에 섣불리 뮤지컬계에 발을 들이기가 조심스러웠다. 때문에 뮤지컬 제안을 거절하기도 했다. 그러나 '난 아직 어리고 1년간 공연을 하면서 경험을 한 뒤 학교로 돌아와도 되겠다'는 생각에 1년간 네덜란드 극장을 투어하면서 많은 것들을 느끼고 배웠다. 그 때 이름을 알리면서 상도 받고, 영화 및 방송 활동까지 하게 됐다. 순식간에 많은 것들을 경험했다.
"지금은 뮤지컬이 정말 잘 맞아요. 처음 시작할 때는 되게 힘들었어요. 나의 개성을 살리는 게 아니고 내가 아닌 모습을 보여줘야 된다는 의식이 있었거든요. 그렇게 할 필요도 없고 그렇게 하라는 사람도 없는데 제가 그런 거예요. 그 의식을 버리고 나니까 점점 쉬워졌어요. 더 자연스러워졌어요."
의도한 시작은 아니었지만 이후 차근차근 뮤지컬의 길을 가게된 전나영은 한국 무대에도 서고 싶었다. "교포인 사람들은 다 한국에 대해 관심이 많을 것"이라고 밝힌 전나영은 "집안에서도 한국처럼 생활하긴 했지만 밖에 있는 세상과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을 거라 생각했고, 그 세상이 정말 궁금했다"고 고백했다.
이어 "한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해보고 싶었다. 여행도 해봤지만 '단체 생활을 하는건 어떨까?' 궁금했고 한글로 노래하는 것이 또 다른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며 "아무래도 내가 배운 첫 언어가 한국말이다보니 한국 무대에 서고 싶었다. 부담도 느꼈지만 한국 무대에 서는 것은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기 때문에 완전 실패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처음 선 한국 무대는 어떨까. 전나영은 "똑같은 작품이고 노래이긴 하지만 공연 자체는 다 다르다"며 "판틴 역시 다른 깊이를 찾고 있다. 영국과 달리 더블로 역을 맡았기 때문에 시간과 여유를 갖게 되니 감정적으로 조금 더 깊게 판틴에게 들어갈 수 있고 역할에 대한 고민과 연구도 많이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요즘은 일기를 쓰고 있어요. 공연할 때마다 지금 나의 느낌을 쓰죠. 요즘 생각하는건 완전히 판틴에 들어가야 한다는 거예요. 전나영이라는 배우가 아니고 판틴이라는 인물이 되기 위한 과정에 대한 연구를 많이 하고 있어요. 판틴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건 내 안에 그 감정이 있는 거라 생각해요. 판틴은 너무 빨리 죽는데 무대에 서는 그 20분 동안 판틴의 영혼을 무대에 두고 갈 수 있어야 해요. 그 영혼이 장발장의 인생을 바꾸기 때문에 엄청나게 큰 역할이죠."
전나영은 여전히 판틴을 더 알고 싶고, 더 알아내려 노력한다. 열정을 포기하지 않고 그 힘으로 살아갔던 여자이기 때문에 그 마음을 더 깊게 이해해야 한다. 자신을 보고 '교포래', '노래한대'라며 '배우' 전나영을 떠올리게 하고 싶지 않다. 오로지 판틴 역에 집중할 수 있게 만들고 싶었기에 더 노력하고 연습했다.
"판틴 역은 엄청 불쌍해요. 하지만 불쌍한 역을 한다고 해서 '불쌍한 내 팔자'라고만 생각하지 않아요. 불쌍하게 보여질 부분들에선 빨리 그 감정에 들어가지만 판틴은 그걸 겪으면서도 나의 자존심을 갖고 내가 사랑하는 코제트를 위한 인생을 사는 게 있기 때문에 그 부분이 중요했고, 제게 큰 연구였어요. 자신의 딸을 위해 희생하는데 '내 딸 부디 지켜주세요'라고 할 때 전 사실 내 딸만을 위해서는 아니고 온 세상 아이들을 위한다는 생각을 해요. 그래서 장발장이 그렇게 해준다고 할 때 너무 행복하게 눈 감을 수 있게 되죠. 그래서 판틴의 마지막이 참 평화로워요."
전나영은 '레미제라블'에서 판틴 역을 하는 것이 참 감사하다. 서로를 너무 빨리 판단하면서 오해를 하게 되고, 전쟁은 더 커지게 되는 이 현실에서 끝까지 사랑을 위해 싸우는 판틴이 될 수 있다는 것이 고맙고 힘이 된다.
그는 "난 '레미제라블'이라는 작품을 믿는다. 이 작품이 이 세상에 필요한 작품이라는걸 느꼈다. 내가 믿고 하는 이야기에 대한 책임감도 있다"고 자부했다.
처음 서게된 한국 무대, 아쉬운 점도 물론 있지만 알고 싶은 게 더 많다. 전나영은 "한국 무대에 계속 서고싶다"며 강한 의지를 내비쳤다.
"한국이 되게 궁금해요. 혼란스러운 일이 많지만 어떻게 나아갈지 그 과정을 바라보고 싶기도 하고, 한국에 조금 더 있고 싶어요. 대단한 작품들이 많잖아요. 그 무대에도 서고 싶고요. 한국 관객분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진실한 전나영이 되겠다는 거예요. 서로 보고 배우자고요. 관객들이 저를 보고, 혹은 그 역할을 보고, 저는 또 한국 사람들, 관객들을 보고 서로 배워가자고 말하고 싶어요."
뮤지컬 '레미제라블'. 공연시간 180분. 2016년 3월 6일까지 서울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 문의 1544-1555
[뮤지컬배우 전나영. 사진 = 송일섭기자 andlyu@mydaily.co.kr]
허설희 기자 husullll@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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