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직리뷰
정말 지루한 일이지만 이런 압도적인 앨범 앞에선 또 케케묵은 감탄사를 내뱉어야 할 것 같다.
"이게 정말 한국 헤비메탈 음반이라고?!"
정확히 말하면 아니다. 여기엔 일본 연주자와 미국 연주자도 참여했기에 그렇다.(믹싱과 마스터링은 스웨덴에서 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맞는 말이다. 이 작품은 한국인 홀로 모든 작사와 작곡, 노래, 건반 연주, 컴퓨터 프로그래밍, 프로듀싱, 어레인지를 해낸 것이기 때문이다. 즉 'Hegemony Shift'는 한국인 한 사람이 제작과 관련한 거의 모든 '헤게모니'를 쥔 앨범인 셈이다. 프로젝트 이름은 아그네스(Agnes). 고대 그리스어 하그노스에서 파생된 말로 '순결'을 뜻한다. 그 뜻 그대로 'Hegemony Shift'는 프로그레시브 성향을 가미한 심포닉/멜로딕 메탈이라는 오래된 장르에 한 로커의 음악적 순결을 바친 작품이다.
그 '한국인'은 바로 김성훈이라는 사람이다. 세간에선 'Mevin Kim'이라는 이름으로도 통한다. 아마도 국내 헤비메탈 팬들에겐 지하드(Zihard)의 2007년작 'Life Of Passion'에서 가공할 만한 성량을 들려준 인물로 기억될 것이다. 김성훈은 이후 2014년, 평소 친분이 있었던 일본 헤비메탈 밴드 레이첼 마더 구스(Rachel Mother Goose, 이하 'RMG')에 정식 프런트맨으로 들어가 정규작 두 장에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그중 한 장인 'Synrabansho'는 지난 5월 26일에 발매됐다. 그러니까 김성훈은 사실상 솔로 앨범인 'Hegemony Shift'와 더불어 한해(아직 7월이다)에 자신이 참여한 정규 앨범만 두 장을 내놓은 것이다. 대단한 열정이다.
아그네스의 데뷔작에서 김성훈의 테크니컬 보컬은 아찔하리만치 감동적이다. 가슴 벅찬 코러스 멜로디, 끝을 모르고 치솟는 박력의 샤우팅은 이 계열 장르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도무지 어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와 함께 덜컹거리는 갤로프 리듬(Gallop Rhythm)에 올라탄 타이틀 트랙 'Hegemony Shift'와 'Neo Exodus', 'Polar Summer' 등에선 키보드 리프를 전면에 내세우거나 기타와 배틀을 펼치며 작품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김성훈 자신이라는 걸 재차 강조한다.
하지만 이것은 김성훈의 '마이셀프(Myself)' 같은 앨범이면서 한편으론 다른 연주자들의 협력이 없었다면 만들어내지 못했을 앨범일지도 모른다. 다른 연주자들이란 앞서 말한 '일본인과 미국인' 플레이어들이다. 여기서 일본인 연주자들은 다름 아닌 RMG의 동료들로 기타리스트 우에키 히데시가 여섯 곡을 소화했고, 베이시스트 나카무라 카즈는 5번 트랙 'Areumda War'를 뺀 모든 곡에 자신의 실력을 보탰다.(5번 트랙은 자코(Jaco Pastorius)와 우튼(Victor Wooten), 패티투치(John Patitucci)에게 영향받은 것으로 알려진 주안 코로나(Juan Corona)가 연주했다.) 나카무라는 'Agnes Dei'에서 걸쭉한 톤과 'Polar Summer'의 브릿지 솔로로 자신이 이 앨범에 있어야 할 이유를 설명했다. 또 드러머 요코야마 요스케는 앨범의 모든 곡에 자신만의 독창적 그루브를 입혔는데, 그의 더블 베이스 드러밍을 앞세운 후련한 콤비네이션 플레이는 김성훈이 그렸을 장르의 질주감을 표현하는데 큰 힘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라인업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건 우에키가 기타를 내려놓을 때 그 기타를 이어받는 이가 또 다른 한국인이란 사실이다. 그의 이름은 최정현(Jeonghyun Choi). 자세한 이력은 알 길이 어렵지만 'Agnus Dei'나 'Mutant Power' 같은 곡에서 들려주는 파워 리프, 멜로딕 기타 솔로 실력으로 봐선 보통은 아니라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우에키와 최정현이 손대지 않은 두 곡의 솔로는 랜디 로즈와 에드워드 밴 헤일런의 유산을 물려받은 기타리스트 제프 콜만이 맡았다. 그는 'Neo Exodus'와 'Forget Me Not'에서 자신만의 톤과 릭(Lick)으로 존재감을 뽐내며 스스로 유에프오(UFO), 아시아(Asia)를 거쳤음을 분명히 들려준다.
김성훈은 음악과 마찬가지로 가사에도 공을 들인 느낌이다. 일단 그것은 종교적이다. 가령 인트로 소품 'Dies Irae:The Beginning of the End'가 최후의 심판이 벌어지는 세상의 멸망 때 예수 그리스도가 강림한다는 '진노의 날'을 뜻한다는 건 그 강력한 예다. 또한 바흐의 '마태 수난곡'에서 영감을 얻은 'Agnes Dei'가 프로그레시브 메탈풍 세션 연주와 장엄한 성가대 코러스를 매개 삼아 드라마틱한 전개를 펼치는 데에서도 작품의 부분적 종교 성향은 드러난다.
영화 '터미네이터' 시리즈를 떠올리게 하는 앨범 재킷 그림이 그대로 노랫말에 녹아든 'Hegemony Shift'는 해당 영화의 주제와 같은 디스토피아 전장을 그려내고, 계급과 계층에서 자유로운 '인간 존엄'이라는 대명제를 다룬 'Neo Exodus'는 한글로 언어유희를 펼친 'Areumda War'와 함께 김성훈의 휴머니즘적 입장을 대변한다. 여기서 제목 'Areumda War'는 발음 그대로 '아름다워'를 뜻하고 가사에서 'Charm Areumdaun-neo' 역시 우리말 '참 아름다운 너'를 가리킨다. 특히 '아름다워'에서 '워'는 전쟁(War)에, 진정(True)의 다른 말인 '참'은 매력(Charm)에, 그리고 '너(You)'는 '새롭다(Neo)'에 연결시키는 감각은 작사가로서 김성훈의 창의적 면모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물론 임재범, 김종서, 박완규, 김경호 정도에만 갇혀있던 한국 록 보컬 계보의 허를 찌를 보컬리스트 김성훈의 존재감 역시 이 곡들은 필사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의 관심이 종교와 피안에만 있는 건 아니다. 그는 차안의 현실도 직시한다. 예컨대 박진감 넘치는 기타 리프를 장착한 'Polar Summer'가 기후 위기 차원에서 일침을 놓고 나면 김성훈의 키보드 솔로가 작렬하는 'Mammon'은 거부할 수 없는 우리네 현실인 '빈익빈 부익부'를 다룬다. 이어 'Mutant Power'에는 가상의 대참사인 차이나 신드롬(The China Syndrome)이 등장하는가 싶더니 'Capital Empire'와 'Dream Formula'에선 자본의 부조리한 생리에 맞서거나 제도권 교육, 매스컴의 세뇌를 경계한다.
그리고 또 하나의 현실. 2021년 지금, 갈 곳을 잃은 한국의 하드로커와 헤비메탈러들이다. 그들의 방황이 꼭 코로나19 팬데믹 때문만은 아니다. 언젠가부터 그들의 소외는 일상이 되었다. 왜냐하면 한국엔 이들이 활동할 변변한 시장이 없(다시피 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는 가장 유력한 길은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것뿐인데, 이조차 '프로가 프로에게 심사받는' 과정이 흥행의 핵심이어서 보는 입장에선 종종 안쓰러울 따름이다. 이처럼 궁지에 몰린 한국 언더그라운드 록/메탈 뮤지션들에게 김성훈의 결과물은 큰 울림을 준다. 없는 시장을 개척하려 말고 있는 시장으로 떠나라. 시공간의 구분이 무의미한 글로벌 시대에는 그게 답일 수 있다. 자신의 음악이, 자신이 추구하는 장르가 배제되고 무시되는 곳에서 뮤지션은 더 주눅 들 수밖에 없으니. 어쩌면 김성훈은 'Hegemony Shift'를 통해 이런 말을 전하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자신만의 것으로 평가받아라. 고개 끄덕이며 놀라는 척, 인정해주는 척하는 주류 심사위원들이 아닌 나를 진심으로 원하고 그래서 내 음악을 기꺼이 사줄 '대중'에게!"
한국인이 주도한 글로벌 프로젝트 애그니스의 'Hegemony Shift'는 기존과 이후 멤버들을 모조리 끌어모은 아이언 메이든처럼 돌아온 헬로윈의 신작과 함께 2021년 올드스쿨 헤비메탈계를 빛낼 작품이다. 또한 우리에게도 앙드레 마토스(바이퍼, 앙그라)와 마이클 키스케(헬로윈, 끝곡 'Wings Of The Dawn'은 'A Tale That Wasn't Right'의 스트라토바리우스식 해석처럼 들린다)가 있다는 사실을 이 작품은 조용히 환기시켜준다. 바야흐로 케이(K)가 유행하는 시대. 한국엔 케이팝, 케이방역만 있는 게 아니다. 케이메탈(K-Metal)도 있다.
[사진제공=에볼루션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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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약력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마이데일리 고정필진
웹진 음악취향Y, 뮤직매터스 필진
대중음악지 <파라노이드> 필진
네이버뮤직 ‘이주의 발견(국내)’ 필진
곽명동 기자 entheos@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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