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추밭 스노보더’ 이상호, 평창의 희망이 되기까지 [이후광의 챌린지]

[마이데일리 = 이후광 기자] 강원도 정선에 사는 한 초등학생은 아버지를 따라 썰매를 타러 동네 배추밭으로 향했다. 소년은 썰매가 아닌 ‘스노보드’라는 장비에 끌렸고, 적성을 찾은 소년은 최고의 스노보더가 되기로 다짐했다. 그 때는 몰랐다. 그 소년이 잡은 스노보드가 15년 후 한국 설상 종목의 희망이 될지를.

한국 스노보드의 새 역사를 쓴 이상호(22, 한국체대)의 유년 시절 이야기다. 이상호는 지난 19일 2017 삿포로 동계아시안게임 스키 스노보드 남자 대회전에서 금메달을 따냈다. 한국 스노보드 사상 최초의 동계아시안게임 금메달.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다음날 열린 회전에서도 1위를 차지하며 대회 '2관왕'에 등극했다. 배추밭에서 스노보드를 즐기던 소년은 단숨에 아시안게임 스타가 됐다.

▲ ‘배추밭 소년’ 이상호, 스노보드의 매력에 빠져들다

이상호는 1995년 9월 강원도 정선군에서 태어났다. 지역 특성 상 어릴 때부터 눈을 접할 기회가 많았고, 이는 곧 설상 종목에 대한 친숙함으로 이어졌다. 이상호가 스노보드를 처음 접한 건 다름 아닌 고랭지 배추밭을 개조한 사북읍 눈썰매장이었다. 이상호는 “초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 손에 이끌려 썰매를 타러 갔는데 거기서 우연히 스노보드를 접했다”라고 과거를 회상했다.

8살 어린이 이상호는 서서히 스노보드의 매력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재미있었고, 종목 자체가 내 성향과 맞았다”라는 게 스노보드가 좋아진 이유. 이상호는 2년 뒤인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적성에 맞는 일을 하면 능률이 오르기 마련. 그는 2013년 세계주니어선수권대회 대회전 및 회전 9위를 시작으로 2014년 대회전 은메달, 2015년 대회전 금메달 및 회전 동메달을 따내며 주니어계의 강자로 떠올랐다.

성인 무대에 뛰어든 이상호는 발전을 거듭했다. 스노보드 강국에서 성장한 유럽 선수들을 상대로 결코 주눅 들지 않았다. 지난해 3월 유로파컵 알파인 평행회전 아시아 최초 정상, 12월 월드컵 평행대회전 4위 등 가시적인 성과가 이를 입증했다. 그가 써내려가는 기록에는 항상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이상호는 이번 아시안게임 2관왕을 통해 아시아 최강임을 확인함과 동시에 평창올림픽을 향한 자신감까지 키웠다.

▲ 노력에 더해진 협회의 전폭적 지원

현대 스포츠에서 선수의 노력만으로 성과가 나오는 사례는 서서히 줄고 있다. 선수의 노력에 자본의 힘이 더해졌을 때 성적은 극대화된다. 물론 지원이 적은 비인기 종목에서도 메달이 종종 나오곤 하지만 일반적인 사례는 아니다.

스노보드도 그랬다. 동계 레저스포츠에서 스노보드에 대한 수요가 꾸준히 늘고는 있지만, 스포츠 종목으로서의 스노보드는 주 관심 밖이었다. 불과 3년 전인 2014년만 해도 스노보드 알파인 국가대표팀은 코치 1명이 선수 5명을 책임져야 했다. 열악한 환경이었다. 그럼에도 한국 스노보드 1세대로 불리는 이상헌 총 감독은 2012년부터 대표팀을 맡아 묵묵히 이상호, 최보군 등 스노보드 인재들을 탄생시켰다.

대표팀에 본격적으로 자본력이 더해진 건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협회장으로 부임한 지난 2014년 말부터다. 홈에서 열리는 2018 평창동계올림픽에서의 선전을 위해 신 회장은 “스키의 르네상스 시대를 열겠다”며 돈을 풀었다. 가장 파격적인 건 포상금 약속이다. 월드컵, 세계선수권, 올림픽 모두 포상금을 걸었다. 포상 규모가 가장 큰 올림픽에서 메달을 획득할 경우 금메달 3억원, 은메달 2억원, 동메달 1억원을 각각 받게 된다. 올림픽은 특별히 6위까지 포상금 수여범위를 넓히기로 했다. 대한스키협회 관계자들은 “최근 설상 종목의 성과는 신 회장님의 지원이 큰 몫을 했다”고 입을 모은다.

더불어, 신 회장은 부임과 동시에 코치진을 대거 수혈했다. 축구협회가 ‘축구 강국’ 네덜란드 출신의 거스 히딩크 감독을 데려왔듯이, 스키협회도 스노보드 강세의 유럽에서 코치를 대거 영입했다. 크리스토프 귀나마드 기술 전문 코치(51, 프랑스), 이반 도브릴라 왁싱 담당 코치(34, 크로아티아), 시모니 프레드릭 물리치료사(44, 프랑스)가 그들이다. 귀나마드 코치는 유럽에서도 특급 지도자로 분류되는 소위 ‘A급’ 코치. 이 감독도 “이렇게 코치진이 많은 적은 처음이다. 최고의 시스템 아래서 운동을 하게 됐다”라고 유례없는 지원에 놀라워했다.

협회는 기술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부분까지 신경 쓰는 세심함을 보였다. 김연아, 박태환의 심리 상담 멘토인 조수경 박사가 합류해 대표팀의 경기력 향상을 도운 것. 실제로 이상호는 2관왕 달성 후 “개인적으로 조수경 박사님의 멘탈 트레이닝이 큰 힘이 됐다”라고 밝혔다. “자신감은 항상 넘치는데 경기에 임하는 집중력이 부족했었다. 박사님의 도움으로 실전에서 기량을 완전하게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됐다”는 게 구체적인 성과다.

▲ 한층 더 가까워진 평창 ‘금메달’…관건은 실수 줄이기

이상헌 총 감독은 지난 21일 귀국 인터뷰에서 이상호의 기량에 대해 “세계 톱랭커들도 인정하고 있다. 지금의 경기력이면 상위권 기량이라고 봐도 무방하다”라고 평가했다. 이제 관건은 올림픽 당일 최상의 컨디션을 만드는 일이다. 이 감독은 이와 함께 실수를 최대한 줄여야 한다고 말한다.

올림픽 정식종목인 평행대회전 같은 경우 알파인 스키처럼 두 선수가 기문(旗門) 코스를 동시에 출발해 빨리 내려오는 선수가 승리를 거둔다. 각 기문에서 엣지를 얼마나 섬세하게 다루느냐에 따라 성패가 좌우된다. 특히 엣지가 1개인 스노보드는 2개인 스키에 비해 실수 대응력이 떨어진다. 이 감독은 “스노보드는 엣지 하나에 모든 게 달려 있다. 경기 당일 정상급 선수라도 말도 안 되는 실수를 할 수 있다. 그만큼 변수가 많다. 그런 변수 또한 최소화 할 수 있는 테크닉을 키워 실수를 최대한 줄이는 게 관건”이라고 강조했다.

이상호는 오는 3월 초 터키 월드컵을 시작으로 스페인 세계선수권, 독일 월드컵 등으로 시즌을 마무리한다. 평창올림픽 대비와 함께 지난해 4위의 아쉬움을 털고 한국 최초의 스노보드 월드컵 메달에 도전하겠다는 각오다. 이 감독은 “월드컵에서 3위 안에 든다면 충분히 평창 메달도 내다볼 수 있다”고 남은 시즌의 성과를 강조했다.

이상호 역시 “아시안게임 2관왕을 통해 서서히 주변의 기대가 느껴지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홈에서 열리는 올림픽이니 가능하다면 다른 선수들보다 미리 설질을 경험하면서 훈련하고 싶다”라며 “많은 응원 부탁드리고, 좋은 결과로 기대에 부응하겠다”라는 각오를 내비쳤다. 고향에서 열리는 올림픽에서 정상에 오르겠다는 이상호의 꿈이 무르익고 있다.

[이상호. 사진 = 마이데일리 DB, 대한스키협회 제공]

이후광 기자 backlight@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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