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명동의 씨네톡]‘버닝’,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마이데일리 = 곽명동 기자]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창동 감독의 ‘버닝’은 메타포(은유)로 가득하다. 극중 해미(전종서)는 벤(스티븐 연)에게 “메타포가 뭐야?”라고 묻는데, 벤은 종수(유아인)가 알고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버닝’은 종수가 메타포가 무엇인지 자신의 이야기로 답을 해주는 영화다.

#포크너-하루키-이창동의 정반합

‘버닝’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헛간을 태우다’를 각색했다. 이 소설은 윌리엄 포크너의 ‘반 버닝(Barn Burning)’의 영감을 받았다. ‘반 버닝’은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는 남자와 그런 아버지를 대신해서 죄의식을 느끼는 아들의 이야기이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은 한 남자가 왜 헛간을 태우는 것인지 명확한 이유를 밝히지 않는 미스터리한 스토리다.

벤이 종수에게 어떤 작가를 좋아하느냐고 물었을 때, 종수는 윌리엄 포크너라고 답한다. 벤 역시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을 읽는다. 윌리엄 포크너는 부도덕한 미국 남부 상류층의 사회상을 고발한 작가다.

그러니까 이창동 감독은 윌리엄 포크너의 ‘분노’와 무라카미 하루키의 ‘미스터리’를 경유해 ‘버닝’을 만들었다. 종수는 온통 미스터리한 세상에서 마지막에 자신의 분노를 버닝시킨다.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종수의 파주 집에서 해미가 춤을 추는 장면을 어떻게 해석해야할까. 이창동 감독은 “낮과 밤의 경계인 노을을 배경으로 두 남자 사이에서 해미만 혼자 삶의 의미를 구하는 춤을 추고 있다”고 설명했다.

해미는 ‘그레이트 헝거’를 갈망하는 춤을 추는데, 이때 해가 지는 배경으로 태극기가 휘날리고 철새가 날아간다. 카메라는 오른쪽으로 서서히 움직이다가 푸른 나무를 비춘다.

이 장면을 보며 황지우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가 떠올랐다. 이 시는 군부독재의 암울한 현실을 벗어나고자 하는 소망과 함께 닫힌 상황에 대한 무력감을 노래하는 작품이다. 새들은 자유롭게 날아가지만, 국민은 무력하게 앉아야만 했다.

‘버닝’의 해미와 종수도 시의 화자와 같은 현실이 아닐까. “우리도...이 세상 밖 어디로 날아갔으면 하는데...주저 앉는다”라고 노래하는 화자처럼, 해미는 ‘여성을 위한 나라는 없다’ 속에서 실종됐고, 종수 역시 출구가 막힌 청춘의 한 시절을 보내고 있다.

클로즈업으로 강조된 푸른 나무는 무엇일까. 청춘이다. 푸르러야할 청춘을 우람한 나무로 보여준다. 그러나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연명하는 종수와 카드빚에 시달리는 해미의 현실은 잿빛으로 일그러져 있다.

#고양이를 찾아나서는 종수

해미는 아프리카 여행을 떠나기 전, 자신이 없는 동안 고양이를 돌봐달라며 종수에게 부탁한다. 정작 해미의 집에 고양이는 없었지만, 해미는 분명히 있다고 말한다. 존재가 모호했던 고양이는 해미가 실종된 이후 벤의 집에서 발견된다. 이는 종수가 해미 실종의 범인으로 벤을 의심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고양이의 이름은 ‘보일(Boil)’이다. 끓는다는 뜻의 동사다. 벤의 집에 손님이 찾아와 문이 열렸을 때 고양이는 도망간다. 종수가 주차장에 숨어 있는 고양이를 찾아 “보일”이라고 이름을 부르자, 종수의 품에 안긴다. 종수는 고양이 이름을 부름으로써 잠재돼있던 ‘분노’를 끓이며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는다(집 나간 고양이를 중요한 플롯으로 사용한 점은 코엔 형제의 ‘인사이드 르윈’과 비슷하다). 해미의 고양이는 종수의 분노를 촉발시키는 매개체다.

#우물은 존재했는가, 존재하지 않았는가.

해미는 어린 시절, 자신의 집에 있는 깊은 우물에 빠졌을 때 종수가 구해줬다고 말한다. 그러나 종수는 그런 기억이 전혀 없다. 동네 어른과 해미 가족에게 우물의 존재 여부를 물었지만, 모두 모른다거나 없었다고 답한다. 오래전 집을 떠난 엄마를 오랜만에 만나 해미 집에 우물이 있었냐고 묻는다. 엄마는 얕은 우물이 있었다고 기억한다.

비록 깊지 않고 얕았지만, 우물이 존재했다는 것은 ‘사실’이다(적어도 엄마의 진술에서는 그렇다). 종수는 우물에 빠진 해미를 구해줬다는 것을 잊고 살았다. 늦었지만, 이제 실종된 해미를 다시 한 번 구해줘야할 차례다.

#이제 진실을 말해봐

해미는 종수에게 “이제 진실을 말해봐”라고 말한다. 얼굴 생김새의 변화를 놓고 던진 질문이다. 영화 맥락상 이 대사는 예쁘다, 안 예쁘다를 묻는 게 아니다. 이 세상을 이해 불가능한 미스터리로 느끼고 있는 종수에게 너의 진실이 무엇인지를 드러내라는 ‘화두’ 같은 것이 아닐까.

라스트 신의 충격적 장면이 펼쳐지기 직전, 종수는 해미의 집에서 무엇인가에 몰두한 채 소설을 쓴다. 벤이 어떤 소설을 쓰냐고 물으면, 종수는 어떤 것을 써야할지 모르겠다고 답했다. 해미의 실종 이후 범인의 단서를 찾아낸 종수는 이제 ‘어떤 소설’을 써야할지 명확하게 깨닫는다. 억눌렸던 분노를 폭발시키는 것. 그렇게 종수는 무력한 청춘을 ‘버닝’시킨다.

[사진 제공 = CGV 아트하우스]

곽명동 기자 entheos@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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