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명동의 씨네톡]‘화씨 11/9 트럼프의 시대’, 썩은 시스템을 바꿔라

[마이데일리 = 곽명동 기자]최근 미국은 트럼프 대통령의 ‘러시아 스캔들’과 ‘성 스캔들’로 시끄럽다. 워싱턴포스트는 지난 9일 “수사 기록상 트럼프 측과 러시아의 접촉이 알려진 것보다 훨씬 광범위했다”고 보도했다. 트럼프의 해결사로 불린 마이클 코언 변호사는 포르노 배우 스토미 대니얼스와 플레이보이 모델 캐런 맥두걸에게 2016년 대선 당시 ‘10년전 트럼프와의 성관계를 발설말라’며 준 13억 달러와 15억 달러의 돈이 트럼프의 지시로 지급됐다고 말했다. 미국 정가에선 탄핵이 화두로 떠올랐다. 그러나 230년 미국 역사상 탄핵으로 면직된 대통령이 없었다. 상원은 공화당이 과반을 차지하고 있는데다 민주당도 역풍을 우려해 탄핵이 실현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세계적 다큐멘터리 감독 마이클 무어는 이렇게 반문할 것이다. “탄핵으로 세상이 바뀔 것인가?” 그는 고개를 젓는다. 미국의 양당 정치에 더 이상 희망이 없으니까. 일각에서 ‘선동주의’라는 비판을 받고 있지만, 마이클 무어는 줄기차게 미국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렸다. GM의 공장폐쇄에 따른 플린트시의 초토화를 다룬 ‘로저와 나’, 9.11 테러와 부시 대통령의 관계를 폭로한 ‘화씨 9/11’, 총기사고의 뿌리를 파고든 ‘볼링 포 콜롬바인’, 의료보험체계의 허점을 비판한 ‘식코’ 등에서 풍자의 날을 벼렸다. 최근 한국에서 개봉한 ‘화씨 9/11:트럼프의 시대’를 통해 마이클 무어는 트럼프가 대통령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추적한다.

시청률에 목마른 언론은 트럼프를 대서특필했다. 버니 샌더스가 대선 후보로 선출되지 않은 것에 대한 반감으로 민주당 지지자들은 투표를 독려하지 않았다. 공화당의 미시건 주지사 리처드 스나이더는 플린트시 수도사업을 민영화하고, 수원지를 휴런 호에서 플린트 강으로 바꿔 납중독을 일으켰다. 플린트시민이 납중독으로 시름시름 앓아갔지만, 오바마는 재해지역으로 선포하기는커녕 납중독 수돗물을 입에 대는 시늉만하는 정치적 쇼를 펼쳤다. 민주당은 1992년 클린턴 대통령 시절부터 공화당과 ‘타협’을 외치며 서민의 삶을 외면했다. 여기에 미국의 복잡한 선거인단 투표제까지 겹쳐 힐러리는 300만표를 더 얻고도 트럼프에 패배했다.

트럼프 당선 이후 미국 정신분석학자들은 ‘도널드 트럼프라는 위험한 사례’라는 책에서 그가 극단적 쾌락주의자이자 나르시스트라고 분석했다. 이들은 그가 타인을 비인간적으로 취급하고, 거짓말을 일삼고, 여성을 혐오(스타가 되면, 여자들이 그걸 해주게 한단 말이야. 뭐라도 할 수 있어)하고, 외국인을 싫어하는 인종주의를 드러내고, 자신의 업적이나 재능을 과장하며, 열등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멸시한다고 지적한다. 아니나 다를까. ‘화씨 9/11’은 트럼프가 버젓이 방송에 나와 딸 이방카에게 성적인 농담을 던지고, 마이클 무어를 상대로 거짓말을 하고, 비판적인 언론을 배제하는 모습 등을 담았다.

미국 정치에 대한 실망감이 높아지고 있지만, 풀뿌리마저 죽지는 않았다. 전직 군인은 정치를 바꾸기 위해 시위 현장에 뛰어 들었다. 미국 교사들은 열악한 처우에 항의하며 파업에 돌입했고, 결국 임금인상성과를 얻어냈다. 무차별 총기난사로 고통받는 10대들은 스스로 집회를 조직해 대규모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이들의 등장만으로 미국이 바꿀 수 있을까. 마이클 무어는 회의적이다. 점점 히틀러를 닮아가는 트럼프를 각종 자료와 영상으로 보여준 뒤, 암울한 미래를 바꾸기 위해선 행동에 나서야한다고 촉구한다. 그는 “헌법, 선거, 탄핵이 우리를 구할 것이라는 생각은 헛된 희망”이라며 “썩은 시스템을 바꿔야할 때”라고 외친다.

‘화씨 11/9:트럼프의 시대’를 보면, ‘자만의 덫에 빠진 민주주의(데이비드 런시먼 지음)’의 어느 구절이 떠오른다.

“미국 유권자들이 트럼프에게 던진 표는(미국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넌더리를 표현하는 동시에, 체제에 대한 자만(자신감)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어쨌든 자신들이 선택한 결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남아 있지 않은 한, 누가 그런 인물에게 권력을 위임했겠는가? 트럼프의 인간적인 자질에 대해 환상을 계속 품고 있는 유권자는 거의 없었다.”

저자는 “트럼프의 인간적 자질 가운데 최악의 것이 자신들이 아니라 타인들을 향하리라고 느꼈기 때문에” 미국 유권자들이 트럼프에 표를 던졌다고 진단한다. 내가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민주주의 체제가 나를 보호해주고, 잘못된 결과는 타인에게 전가될 것이라는 근원적 믿음이 계속되는 한, 제2의 트럼프는 언제든 나올 수 있다.

마이클 무어가 시스템을 바꾸자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진 제공 = 영화사 진진]

곽명동 기자 entheos@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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