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미상’, 역사의 비극X사랑의 매혹X예술의 감동이 몰아친다[MD리뷰]

[마이데일리 = 곽명동 기자]2차 세계대전 전후의 독일, 미술학도 쿠르트(톰 쉴링)는 죽은 이모와 같은 이름의 여인 엘리(폴라 비어)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동독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환멸을 느낀 쿠르트는 엘리와 함께 위험을 무릅쓰고 서독으로 탈출을 감행한다. 나치 우생학 신봉자 제반트 교수(세바스티안 코치)와의 악연이 점차 압박해오는 가운데 캔버스에 앞에 앉아 어떤 그림을 그릴지 몰라 고뇌에 빠진 쿠르트는 어느날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고 붓을 잡는다.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감독의 ‘작가미상’은 역사의 비극, 사랑의 매혹, 예술의 감동을 결합시킨 작품이다. 독일 나치가 저지른 끔찍한 만행에 가족의 아픔이 서려 있고, 불꽃처럼 뜨거운 사랑의 아름다움이 배어 있다. 사랑으로 고통의 시간을 견뎌낸 예술가가 자신만의 창작품을 만들어낼 때의 환희의 순간도 새겨 있다. 역사와 사랑과 예술에 관한 오딧세이가 실화를 바탕으로 숨가쁘게 전개된다.

영화의 원작은 독일 언론인 위르겐 슈라이버의 ‘한 가족의 드라마’로, 나치의 만행과 가족의 희생을 꼼꼼한 취재로 드라마틱하게 담아냈다. 도너스마르크 감독은 역사의 사실에 충실하면서도 자신만의 상상력으로 당대 최고의 실존화가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삶을 극적으로 형상화했다. 특히 초점이 맞지 않은 사진처럼 보이는 ‘블러 효과’(흐리게 하기 기법)를 창작하는 대목에선 짜릿한 전율이 흐른다.

감독의 데뷔작 ‘타인의 삶’의 감정적 여운을 기억한다면, ‘작가미상’의 예술적 감흥에도 공감할 것이다. ‘타인의 삶’의 동독 비밀경찰 비즐러(울리히 뮤흐)가 자신이 감시하던 예술가의 문학에 감흥을 받아 스스로를 구원했듯, 쿠르트는 회화에 영향을 받아 억압에서 벗어났다. 감독의 의식 어딘가에는 인간의 삶이 예술로 풍부해지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 꿈틀거린다. 흥미 위주의 액션 블록버스터가 극장가를 장악한 시대에, 그의 신념은 따뜻한 울림을 전한다.

게르하르트 리히터는 ‘포스트모던의 시대’를 연 화가로 평가 받는다. 2차대전, 나치, 독일 분단, 사회주의 리얼리즘 등의 폭력을 견뎌낸 예술가는 블러 효과를 통해 고정되지 않은 채 열린 의미의 세계를 탐구했다. 이 영화엔 사회·역사적인 압력에 맞서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창조한 예술가의 초상이, 그의 흐리게 하기 기법과는 달리, 또렷하게 살아있다. 예술의 힘으로 끝없이 앞으로 나가라는 이모의 당부가 새삼 강렬하게 다가온다(영화의 영어제목이기도 하다).

“절대 눈길 돌리지 마라(Never look away).”

[사진 제공 = 영화사 진진]

곽명동 기자 entheos@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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