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미상’, 역사의 경적소리[곽명동의 씨네톡]

[마이데일리 = 곽명동 기자]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타인의 삶’에 마음을 빼앗긴 관객이라면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감독의 ‘작가 미상’도 좋아할 것이다. ‘타인의 삶’은 냉철한 동독 비밀경찰 비즐러(울리히 뮤흐)가 극작가 드라이만(세바스티안 코치)과 그의 애인 크리스타(마리티나 게덱)를 감시하다가 그들의 예술혼에 감화 받는 이야기다. 실존인물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삶을 반영한 ‘작가 미상’은 동독 출신의 쿠르트(톰 쉴링)가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환멸을 느끼고, 서독으로 탈출해 자신의 예술혼을 불태우는 작품이다. 도너스마르크 감독은 이념이 한 인간의 삶을 아무리 옥죄더라도, 인간은 이념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자유를 찾는다는 테마를 녹여낸다.

그러나 이 영화는 이러한 표면적인 주제의식 안에 더 깊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독일기자 위르겐 슈라이버의 ‘한 가족의 드라마’에 따르면, 현존하는 최고의 화가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이모는 27살의 나이에 정신병원에 갇혀 나치에게 비참한 죽음을 당했다. 안락사 프로그램을 실행했던 책임자는 리히터의 장인인 산부인과 의사 하인리히 오이핑어다. 그는 독일 패망 이후 신분 세탁으로 처벌받지 않고 90세까지 살았다. 지역신문은 훌륭한 의사였다고 부고기사를 썼다. 젊은 시절 리히터는 장인이 이모의 죽음을 초래했는지 몰랐다. 역사의 비극 속에서 그는 ‘포토 리얼리즘’ 기법으로 세계 최고 화가 반열에 올랐다.

도너스마르크 감독은 약간의 정신착란 증세가 있었지만 뛰어난 예술적 재능을 지니고 있었던 극중 이모(사스키아 로젠달)와 쿠르트의 관계를 통해 ‘이념과 인간’에서 ‘예술과 역사’로 지평을 넓힌다. 쿠르트는 모두 다섯 단계를 거쳐 명성을 얻는다. 먼저, 1937년 나치의 ‘퇴폐미술전’에서 이모는 어린 쿠르트에게 “절대 눈을 돌리지 마라. 진실한 것은 모두 아름답다”고 말한다. 어떻게 보면, ‘작가 미상’은 쿠르트가 “진실한 것은 모두 아름답다”는 이모의 화두를 붙잡고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펼쳐나가는 영화다. 그는 진실을 찾기 위해 숨 막히는 동독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이데올로기를 박차고 나왔다.

둘째, 1948년 청년 쿠르트는 바람이 불어 흔들리는 나무 위에서 무엇인가를 깨닫는다. 그는 아버지에게 달려가 “모든 것은 연결돼 있다. 옳은 것을 찾겠다. 진실한 것을”이라고 말한다. 이때만 하더라도 자신이 깨달은 것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셋째, 부인 엘리(폴라 비어)와 옛날 사진을 보다가 “왜 제일 허접한 사진이 내 그림보다 실제 같지? 자기 사진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 그러니 다들 그림을 좋아하지. 사진이 더 진실할 수 밖에”라고 말한다. 1960년대는 회화의 시대가 저물고 팝아트 등 새로운 예술이 부흥하던 시기다. 그는 서서히 회화와 사진의 접점을 찾아나간다.

넷째, 안토니우스 판 페르텐 교수(전위예술작가 요셉 보이스를 모델로 한 인물)는 쿠르트에게 “너 자신을 찾으라”고 조언한다. 지금까지 그린 작품은 “너가 아니다”라는 것. 교수의 말을 듣고 쿠르트는 자신의 그림을 모두 불태운다. 다섯째, 장인 시발트 교수(하인리히 오이핑어. 세바스티안 코치)와 함께 안락사 프로그램 실행 책임자였던 크롤(라이너 복)이 체포된 신문사진을 보고 드디어 ‘포토 리얼리즘’에 눈을 뜬다. 사진이 회화 같고, 회화가 사진 같은 예술을 ‘흐리게 하기(블러)’ 기법으로 완성한다. 그는 이모의 말대로, 역사 앞에서 “절대 눈을 돌리지 말라” 가르침을 포토 리얼리즘으로 구현한다.

쿠르트는 작업실에서 크롤의 신문사진 뿐만 아니라 어린 시절 이모와 찍은 사진, 장인의 사진을 그림으로 그리는데, 이때 바람이 불어와 창문이 닫히면서 역사의 희생자인 이모와 가해자인 장인이 하나의 캔버스에 합쳐진다. 이 순간, 카메라 시점숏은 작업실 밖의 나무에 위치해있다. 이 영화 전체에서 딱 한번 등장하는 외부의 시점숏이다. 이 시점숏은 아마도 죽은 이모의 영혼일 것이다. 역사의 폭력으로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이모가 쿠르트에게 예술적 영감을 부여하는 동시에 폭력의 역사를 잊지 말라고 당부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당부는 버스 경적소리와도 연결된다.

극 초반부, 퇴폐미술전을 관람한 이모는 어린 쿠르트와 집에 가던 도중 버스 기사들에게 경적소리를 울려달라고 부탁한다. 시끄러운 경적소리를 듣는 이모의 얼굴은 자유를 만끽하는 평화로운 표정이다. 극 후반부, 포토 리얼리즘으로 유명해진 쿠르트는 과거를 떠올리며 이모와 똑같이 버스 경적소리를 듣는다. 그렇다면 감독은 왜 버스의 경적소리를 영화의 앞과 뒤에 배치했을까. “진실한 것은 모두 아름답다”는 화두를 건네준 이모를 추억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앞에서 서술했듯, 이 영화는 쿠르트가 이모의 가르침에 따라 자신의 예술적 가치를 찾아나서는 오딧세이 같은 여정이니까.

그러나 쿠르트가 경적소리를 듣는 모습은 더 큰 의미가 내포돼 있다. 1993년 예술가 귄터 뎀니히는 ‘슈톨퍼슈타인(걸림돌)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독일 거기를 걷다보면 발에 턱턱 걸리는 걸림돌이 있다. 가로·세로 10㎝ 크기의 작은 동판에는 나치수용소에 끌려간 유대인들의 이송날짜, 생일, 기일이 적혀 있다. 역사를 잊지 말고 기억하자는 예술운동이다. 슈톨퍼슈타인이 촉각과 시각에 의한 것이라면, ‘작가 미상’의 버스 경적소리는 청각에 의한 역사의 기억 방식이다. 쿠르트는 그 소리를 들으며 이모의 희생과 나치의 폭력을 잊지 않았을 것이다.

쿠르트처럼, 우리는 역사의 경적소리에 귀를 기울여야한다.

[사진 = 영화사 진진]

곽명동 기자 entheos@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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