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없는 곳', 현실과 허구 그 경계에 있는 것들 [양유진의 클로즈업]

[마이데일리 = 양유진 기자] 현실과 허구 사이 그 어디쯤의 경계, 한 마디로 정의하기 힘든 갖은 감정이 스크린에 펼쳐진다. 영화 '아무도 없는 곳'(감독 김종관)이 관객을 환상의 세계로 이끈다.

이른 봄, 소설가 창석(연우진)은 아내가 있는 영국을 떠나 7년 만에 서울로 돌아온다. 그는 시간을 잃은 여자 미영(아이유), 추억을 태우는 편집자 유진(윤혜리), 희망을 구하는 사진가 성하(김상호), 기억을 사는 바텐더 주은(이주영)과 만나고 헤어지며 이야기를 듣고 들려준다. 사람들을 만나는 공간은 하나같이 익숙면서도 낯설다.

오래된 커피숍 유리창에 기대어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던 미영은 잠에서 깨 창석의 얼굴을 멀겋게 쳐다본다. 어떤 말에도 시큰둥한 반응인 미영은 소설을 읽는 창석에게 "소설은 어차피 지어낸 이야기"라며 연신 하품을 쏟아내지만, 이내 창석이 지어낸 이야기에 빠져들어 잊었던 시간을 돌이킨다. 창석의 새 소설 출간을 돕는 유진은 어떤 존재와의 이별을 털어놓는다. 그는 연인이 남기고 간 인도네시아산 담배를 피우며 상실감에 아파한다. 우연히 들른 카페에서 창석과 마주친 성하. 창석은 병에 걸린 아내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못할 것이 없다. 교통사고로 한쪽 눈과 기억을 잃은 주은은 바 손님의 기억을 모아 시를 쓰며 마음을 달랜다. 그는 손님으로 온 창석에게 술 한 잔에 기억을 팔라고 제안하며 자신의 아픔을 꺼내놓는다.

등장인물 간의 대화, 짧은 에피소드를 엮은 옴니버스 구성 등으로 보았을 때 전작 '최악의 하루'(2016), '더 테이블'(2016), 넷플릭스 '페르소나 - 밤을 걷다'(2019)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액션보다 리액션이 중요한 영화"라는 김종관 감독의 말에서 알 수 있듯 주인공이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입장에 서서 전개를 책임지는 변주를 줬다.

김종관 감독은 "판타지는 아니지만 비현실적인 무드가 있다. 현실과 만든 이야기의 경계를 타고 흐른다"고 영화를 설명했다. 이러한 의도는 첫 장을 장식한 미영의 에피소드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차분하게 속삭이는 목소리로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 미영에게 숨겨진 반전은 사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황홀한 경험을 선사한다.

영어 제목은 '마음의 음영(Shades of the Heart)'. 영화는 죽음, 상실, 늙음 등의 그늘을 품고 있지만 메시지를 무겁게 던지는 대신, 각자의 고민을 담담하게 그려내는 방식을 택했다. 그림자를 설명하려 하기보다 차분한 목소리로 나누는 대화로 관객에게 자연스레 다가가 파동을 일으킨다.

더불어 김종관 감독의 연출작답게 아름다운 미장센을 자랑한다. 미영과 창석이 대화를 나누던 을지로의 커피숍부터 고즈넉한 고궁까지. 서울 골목골목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오는 31일 개봉. 러닝타임 82분.

[사진 = 엣나인필름]

양유진 기자 youjinyang@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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