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르노빌’, 일리야 레핀이 그린 ‘이반 뇌제’, 그리고 황태자의 눈물[곽명동의 씨네톡]

[마이데일리 = 곽명동 기자]왓챠에서 서비스중인 ‘체르노빌’ 3화에는 1986년 당시 소련 크렘린궁에 있을법하지 않은 그림이 등장한다. 참사를 막기위해 동분서주하는 연료동력부 장관 세르비나 부의장(스텔란 스카스가드)과 핵물리학자 레가소프(자레드 해리스)가 고르바초프 서기장에게 보고하러 들어가기 직전, 회의실 앞 복도 벽에 걸려 있는 그림은 일리야 레핀의 ‘1581년 11월 16일 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이다. 원래 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에 있는 작품이다. 감독은 왜 이 그림을 크렘린궁에 걸어놓았을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이반 뇌제가 누구인지, 일리야 레핀이 1885년에 어떤 연유로 그림을 그렸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반 뇌제(폭군)는 러시아 차르 체제의 기틀을 다진 인물인 동시에 폭정을 일삼은 군주였다. 전반기에는 개혁정책을 추진하고 영토를 확장하는 등 성공적으로 국가를 통치했지만, 아내가 죽은 이후 측근들을 처형하며 공포정치를 시행했다. 어느날 며느리가 얇은 옷을 입었다는 이유로 때렸는데, 그만 유산하고 말았다. 잔뜩 화가 난 아들이 대들자, 이성을 잃은 이반 뇌제는 갖고 있던 왕홀로 아들의 머리를 쳤다. 피를 흘리는 아들을 보고 정신이 번쩍 든 아버지는 절망과 슬픔에 빠진다. 러시아 최고의 사실주의 화가 일리야 레핀은 평정심을 놓아버린 아버지의 끔찍한 행동이 얼마나 얼마나 큰 비극을 불러오는지를 섬뜩하게 그려냈다.

1881년 3월 1일 알렉산드르 2세의 암살 이후 불어닥친 대규모 정치적 탄압으로 수많은 사람이 피를 흘렸다. 그 무렵, 화가는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새작품 ‘ 복수’를 듣다가 감동을 느껴 그림으로 표현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는 “나는 차르 이반을 기억했다. 그 해는 1881년이었다. 사람들은 5월 1일 피의 사건에 경악했다. 피의 줄기가 이 해를 관통했다”고 썼다. 그는 만 4년에 걸쳐 그림을 완성했다. 아들의 목숨을 빼앗고 공포에 휩싸인 이반 뇌제의 모습은 정부가 잔혹한 테러를 행하던 시대에 동시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죄없이 죽어간 황태자의 끔찍한 사건은 정치적으로 해석됐다. 급기야 권력을 잡은 알렉산드르 3세는 6개월 동안 그림 전시를 금지했다.

이 그림엔 정치권력의 폭력적 또는 비이성적 통치로 목숨을 잃게되는 민중의 아픔이 담겨있다. 사랑스럽고 착한 아들은 아버지의 슬픔을 느끼며 옅은 미소를 짓고 있다. 더욱 가슴 아픈 것은 황태자의 눈가에 흐르는 가느다란 눈물이다. 죽어가면서도 폭력과 광기에 사로잡힌 아버지를 용서하는 선량한 아들의 모습이라니…. 아버지와 아들의 강렬한 대비는 비극을 더욱 극적으로 만들었다. 실제 황태자는 관자놀이에 피를 흘리고 며칠 뒤에 죽었다. 레핀은 지금 바로 눈 앞에서 죽어가는 듯한 황태자의 모습을 생생한 사실감으로 그려 비극성을 극대화시켰다.

여기까지 알고나면 감독이 이 그림을 걸어놓은 이유가 명백해진다. 레핀은 체르노빌 핵발전소가 있는 우크라이나 출신이다. 세르비나와 레가소프가 회의실에 들어갔을 때 그들의 앞자리에는 비밀경찰 KGB의 수장이 앉아 있었다. KGB는 진실을 폭로하려는 과학자들을 감시하고, 심지어 비밀을 누설했다는 이유로 구금시켰다. KGB의 조상 격인 러시아 최초의 비밀경찰 ‘오프리치니키’를 만든 장본인이 이반 뇌제다. 오프리치니키 조직원들은 검은 옷을 입고 개 머리와 빗자루를 매단 검은 말을 타고 다니며 이반 뇌제의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제거했다. KGB 역시 권력 유지에 방해가 되는 인물을 찾아내 감옥에 보냈다.

이 그림에서 이반 뇌제는 무능하고 진실 은폐에 급급했던 당시 소련 권력자들과 사고 책임자들을 상징한다. 통제 불능에 빠진 권력자의 패닉은 아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아무런 잘못 없이 죽어가는 황태자는 원폭 피해를 입은 민중을 떠올리게 한다. 소방관, 광부 등은 목숨을 걸고 참사를 막으려 노력했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는 공식 기록된 사망자만 3,500명, 암과 기형 등의 피해를 겪은 사람이 40만명에 달했다. 체르노빌 비극은 현재진행형이다. 과학전문지 ‘사이언스’는 지난 5월 체르노빌 원전에서 새로운 핵반응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고 전했다. 언제 또 터질지 모른다.

황태자는 여전히 눈물을 흘리고 있다.

[사진 = HBO,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곽명동 기자 entheos@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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