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의 '보일러 김씨'와 지하실의 ‘기생충’[곽명동의 씨네톡]

[마이데일리 = 곽명동 기자]봉준호 감독은 '플란다스의 개'(2000)와 '살인의 추억'(2003)에서 1980년대를 소환했다. '플란다스의 개'의 경비원 변씨(변희봉)는 아파트 지하실에서 관리 주임에게 보일러 김씨의 전설을 들려준다. 1988년 아파트 건축 붐과 함께 날림 공사가 유행했고, 중앙 보일러는 자꾸 고장났다. 목포에서 30년간 보일러를 수리한 김씨는 고장 원인을 바로 파악하고 고친다. 그는 “얼마나 해먹었냐”며 현장소장과 시공업자와 시비가 붙어 싸우다 죽는다. 가해자들이 시체를 벽에 넣어 바른 이후로 밤만 되면 보일러가 울며 “돈다잉~잉” 소리를 낸다는 게 변씨의 이야기다. 봉준호 감독은 변씨의 장광설을 통해 80년대에 만연했던 불법과 탈법을 상기시킨다.

1988년 부실공사로 지어진 아파트 지하실에서 죽은 보일러 김씨는 1986년 배경의 '살인의 추억'에서 실제 인물로 등장한다. 목포의 김씨가 보일러를 고치기 위해 경기도 화성의 어느 경찰서 지하실에 출장을 왔다고 가정하자(변희봉 역시 경찰에서 퇴임하고 2년 뒤 아파트 경비원이 됐다는 추론도 가능하다). 그는 박두만(송강호), 조용구(김뢰하) 형사가 무덤가에서 연쇄살인 용의자로 지목된 빨간팬티의 남자 조병순(류태호)을 취조하는 지하실 현장에 도착한다. 뚜벅뚜벅 지하실 계단을 내려온 보일러 김씨는 박두만 뒤편에 있는 보일러를 고치고 다시 계단을 올라간다. 봉준호 감독은 엔딩크레딧에서 그가 보일러 김씨라고 명확히 밝힌다.

이 장면을 다시 보자. 보일러 김씨가 박두만, 조용구, 조병순 옆을 지나가는 순간 그와 눈이 마주친 인물은 조병순이다. 박두만과 조용구는 그가 지나가는지도 모른채 취조에 열중한다. 형사에게 두들겨 맞아 얼굴에 멍이 든 조병순은 빨간팬티와 흰색 러닝셔츠만 입고 앉아 있다가 슬쩍 보일러 김씨의 얼굴을 쳐다본다. 김씨는 보일러를 수리하며 폭력, 협박, 강요로 거짓 진술을 받아내고 있는 형사들을 물끄러미 응시한다. 보일러를 고친 그는 이들 옆을 걸어나와 계단에 걸터앉아 있는 서태윤(김상경) 형사 옆을 지나친다. 물론, 서태윤도 그를 인식하지 못한다.

이 장면은 무엇을 말하는가. 실적을 올리기 위해 무고한 사람을 잡아다 폭력을 저지른 경찰의 행태를 유일하게 목격한 사람은 보일러 김씨다. 봉준호 감독은 '시대의 목격자' 보일러 김씨를 통해 폭력의 시대를 증언하고자 했다. 이 영화에서 만약 보일러 김씨가 없었다면, 거짓 자백을 받아내는 경찰의 폭력을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된다. 그의 이름으로 ‘플란다스의 개’와 연결하자면, 이 목격자는 끝내 살아남지 못하고 2년 뒤에 어느 아파트 지하실에서 끔찍한 죽음을 맞이한다. ‘폭력의 시대’를 증언해줄 인물이었던 보일러 김씨는 대규모 아파트 건설이 진행되는 ‘자본의 시대’에 접어드는 시기에 ‘진실을 알았다는 이유’로 영원히 지하실에 갇힌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에서 지하실은 비극이 잉태되는 공간이다. 수평으로만 이뤄져 보이는 ‘설국열차’(2013)에도 지하실이 나온다. 유일하게 생존할 수 있는 유토피아라고 믿었던 설국열차는 알고보니 어린 아이들의 참혹한 노동으로 움직이는 기계였다. 커티스(크리스 에반스)가 요나(고아성)와 함께 엔진실의 밑바닥(지하실)을 들어올리자 거기엔 티미와 앤디가 있었다. 윌포드(애드 해리스)는 열차의 부품 중 하나가 수명이 다 되면, 그 안에 들어갈 수 있는 다섯 살 이하의 작은 아이들을 대체품으로 썼다. 아이들은 지하실에서 살아있는 부품 신세로 전락한다. 그의 영화에서 지하실은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 어두운 진실이 숨쉬는 공간이다.

‘기생충’(2019)의 지하실은 또 어떠한가. 대만 카스테라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망한 근세(박명훈)는 박사장(이선균) 집 지하실에 숨어산다. 그는 거기서 나갈 생각이 없다. 나가면 빚쟁이에게 시달릴 것이고, 딱히 할 일도 없다. 어느날 대만 카스테라로 같이 망했던 기택(송강호) 가족이 들이닥치고, 결국 기택이 지하실을 차지한다. 그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아들 기우(최우식) 밖에 없다. 보일러 김씨가 “돈다잉~잉” 소리로 억울한 죽음을 기억해달라고 하듯, 기택은 모스부호의 전등 깜빡임으로 자신의 생사를 알린다. 시대의 폭력과 양극화의 비극에 빠진 그들은 지하실에서 누군가 자신을 찾아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오늘도 보일러는 돌아가고, 전등불은 깜빡일 것이다.

[사진 = 싸이더스, CJ엔터테인먼트, AFP/BB NEWS]

곽명동 기자 entheos@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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