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 나이트’, 내 목을 쳐라[곽명동의 씨네톡]

[마이데일리 = 곽명동 기자]크리스마스 이브의 아침, 가웨인(데브 파텔)은 흥청망청 놀다가 유곽에서 잠을 깬다. 서둘러 집에 돌아가 아서왕(숀 해리스)의 누이이자 마법사인 어머니 모건 르 페이(사리타 슈드후리)에게 궁정행사에 가자고 하지만, 어머니는 너 혼자 가라면서 마법을 부려 녹색기사를 부른다. 녹색기사(랠프 아이네슨)는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들 앞에 나타나 “가장 용맹한 자, 나의 목을 내리치면 명예와 재물을 주겠다"고 제안한다. 단, 1년 후 녹색 예배당에 찾아와 똑같이 자신의 도끼날을 받는다는 조건을 내세운다. 모두가 주저하고 있을 때, 아무런 모험담을 갖고 있지 않았던 가웨인이 용기를 내 녹색기사의 목을 치고, 1년 뒤 녹색 예배당을 찾아간다.

데이빗 로워리 감독의 ‘그린 나이트(The Green Knight)’는 나약한 청년이 인간은 필멸의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고 용감한 기사로 거듭나는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작자 미상의 ‘가웨인 경과 녹색기사’를 바탕으로 제작된 이 영화는 원작의 큰 틀을 유지하면서 이 시대에도 공명할 수 있는 ‘기사도 정신’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원작의 가웨인은 ‘어리석은 게임’이라고 말하면서도 ‘충성’과 ‘신의’를 실행하기 위해 모험에 나섰다. 영화의 가웨인은 술과 여자를 좋아하는 방탕한 청년에 불과했다. 그는 엉겁결에 녹색기사의 게임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모험담을 만들어 훗날 아서왕의 뒤를 이어 왕이 뒤기 위해 길을 떠난다.

그러나 그의 여행은 ‘죽음에 이르는 길’이다. 그가 녹색 예배당으로 가는 여정은 모두 죽음의 은유로 뒤덮여있다. 먼저, 제일 처음 만난 소년 약탈꾼(베리 케오간)에게 땅에 쓰러져있는 시체들이 왜 묻히지 않았냐고 묻는다. 소년은 “그래도 자연이 알아서 할거예요. 시체를 집어삼키고 꼭 끌어안겠죠”라고 답한다. 어머니가 준 녹색 허리띠(생명보호)와 녹색기사가 남겨놓은 도끼를 약탈꾼에게 빼앗기고 손발이 묶인 채 나무 귀퉁이에 옆으로 누운 채 남겨졌을 때, 카메라는 360도 패닝하면서 해골로 변한 가웨인을 모습을 보여준다. 결국 인간은 죽는다는 것을 강조하는 장면이다. 그는 죽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온갖 몸부림을 치며 밧줄을 끊고 도망친다.

어두운 밤, 빈 집의 침대에 누웠다가 목이 잘린 위니프레드(에린 켈리먼)를 만난다. 어떤 남자가 자신과 자려해서 도망치다가 그만 목이 베였다는 것. 그는 가웨인에게 “기사답게 처신하라”고 말한다. 앞서 약탈꾼에겐 자신은 기사가 아니라고 했다. 그러니까, 나약한 청년은 ‘기사-되기’를 요구받고 있는 것이다. 위니프레드가 “저는 머리가 필요할 뿐”이라고 말하자, 가웨인은 “저도 올해가 가기 전에 그리 될겁니다”라고 답한다. 녹색기사에 의해 목이 잘릴 운명을 명확히 알고 있는 답변이다. 연못에 빠진 두개골을 찾아주자, 위니프레드는 “녹색기사는 당신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녹색기사는 가웨인의 분신일 수도 있다는 암시다.

세 번째 만난 사람은 성주(조엘 에저튼)와 그의 부인(알리시아 비칸데르)이다. 여기서도 ‘기사-되기’를 강조한다. 성주가 “이것과 맞서 싸워 뭘 얻으려는건가?”라고 묻자, 가웨인은 “명예. 기사가 기사답게 행동하는 이유죠”라고 답한다. 가웨인은 고난의 여정을 통해 조금씩 기사와 명예의 중요성을 인식한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부인은 가웨인을 성적으로 유혹하며 어떤 무기에도 몸을 다치지 않게하는 녹색 허리띠를 준다(어머니에게 받은 것은 약탈꾼에게 빼앗겼기 때문에 또 다른 보호대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당신은 기사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유혹에 넘어갔기 때문이다. 가웨인은 목숨을 부지하면서 명예도 지키고 싶은 욕망에 빠졌다.

욕망과 명예는 양립하기 어렵다. 그래서 부인은 녹색의 본질을 일깨워준다. 빨간색은 욕망의 색이고, 녹색은 욕망이 남긴 흔적이라는 것. 녹색은 열정이 죽고 우리가 죽었을 때 정열이 사라지며 남긴 흔적이다. 죽으면 풀이 발자국을 덮고, 이끼는 비석을 덮는다. 결국 인간의 피부 , 뼈, 미덕 등 모든 것을 굴복시킨다. 소년 약탈꾼이 “자연은 시체를 집어삼키고 꼭 끌어안는다”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녹색은 또한 생명의 색이다. 나무로 이뤄진 녹색기사는 잘린 머리를 다시 붙여 생명을 연장한다. 생명을 보호해주는 허리띠 역시 녹색이 아니던가. 가웨인은 녹색의 양가적인 의미를 점차 깨닫는다.

녹색 예배당에 거의 다다를 무렵, 가웨인을 따라다니던 여우는 네가 가는 길의 끝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으니 돌아가라고 말한다. 가웨인이 거부하자 여우는 “네가 찬 녹색허리띠는 다른 말을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가웨인의 어머니 모건 르 페이는 여우의 입을 빌려 아들의 무사귀환을 원하고 있다. 훌륭한 모험을 했으니, 이쯤하고 돌아와서 왕위를 계승하라는 권유다. 진정한 기사가 되고 싶은 가웨인은 끝내 녹색기사를 만난다. 녹색기사의 얼굴엔 영주, 아서왕, 에셀(가웨인의 연인), 성주의 부인, 모건 르 페이, 가웨인의 얼굴이 절묘하게 겹쳐진다. 위니프레드가 말했듯, 녹색기사는 가웨인도 알고 있는 사람이다. 결국 녹색기사는 자기 자신이다.

녹색기사가 목을 치려고 순간, 겁을 먹은 가웨인은 “잠깐만”이라고 외친 뒤 뒤로 물러선다. 여기서 도망쳤을 때 자신의 미래를 상상하는데, 그 끝은 파멸이었다. 가웨인은 마침내 깨닫는다. 인간은 죽고 명예는 남는다는 것을. 어떤 무기의 공격에도 자신을 보호해주는 녹색 허리띠를 풀고 목을 늘어뜨린다. 녹색기사가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용감한 기사여, 이제…. 네 머릴 자르마”라고 말하며 도끼를 내리치려고 하는 순간, 영화는 끝난다. 원작에선 도끼가 가웨인의 목을 빗나가 살짝 상처만 생긴다. 열린 결말이므로, 원작처럼 목숨을 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주고 받기(기브 앤 테이크)’가 영화의 주요 설정인 것을 감안하면, 가웨인이 죽을 가능성도 있다.

그가 살았는지, 죽었는지가 중요한게 아니다. 가웨인은 목숨이 아니라 명예를 선택하며 자신과의 약속을 지켰다. 그는 크리스마스에 다시 태어났다.

[사진 = 팝엔터테인먼트]

곽명동 기자 entheos@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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