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PR 하지마, 성추행 합의금 800만원 물어줬다”… 판례 찾아봤더니

▲최근 직장인 커뮤니티 '블라인드'에는 여성에게 함부로 CPR(심폐소생술)을 하지 말라는 글이 올라왔다. 이를 두고 온라인에서는 여성 혐오적 게시물이라는 비판이 일고 있다. /블라인드

[마이데일리 = 김성호 기자]지난달 29일 발생한 서울 용산구 ‘이태원 핼러윈 참사’ 현장에서는 구조 인력이 턱없이 부족하자 다수의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서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심폐소생술(CPR)을 하며 힘을 보탰다.

그러나 이를 두고 일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여성에게 CPR을 함부로 하지 마라”는 글이 올라왔다. 여성에게 심폐소생술을 시도했다가 ‘성추행범’으로 몰릴 수 있다는 게 이유였다.

조선닷컴 보도에 따르면 최근 직장인 커뮤니티 ‘블라인드’에는 카카오 직원이 쓴 글이 올라왔다. 블라인드는 회사 이메일 인증을 거쳐야만 이용할 수 있다. 닉네임 옆에는 회사명이 표시된다.

카카오 직원은 “함부로 CPR 하지 마라. CPR로 살려놨더니 성추행, 상해로 고소 당하고 합의금 800(만원) 물어줬다. 경찰도 그냥 합의하라고 하더라. 법원에서도 무죄 못 받고 선고유예 받았다. 즉 합의 안 했으면 골로 갈 뻔했다. 119 지시 받고 했는데, 나중에 재판 때 증인 출석도 안 해줬다. 가족 외 어떤 상황이 와도 절대 CPR 하지마라. 인생 작살난다”라고 했다. 현재 이 글은 삭제된 상태다.

이 글에 대한 반응은 남초·여초커뮤니티에서 극명하게 엇갈렸다. 여초 커뮤니티에서는 “죽어가는 자기 CPR해서 살려준 사람 고소할 여자가 어디 있냐. 고소를 당했다면 진짜 성추행을 했겠지”라며 카카오 직원 글이 ‘여성 혐오’를 조장한다고 비판했다.

▲지난달 31일 한 남초 커뮤니티에 올라온 한국 여자 삼원칙. /온라인 커뮤니티

반면 남초 커뮤니티에는 카카오 직원 글에 일부 동의한다는 글이 많았다. 이들은 “1% 확률로 고소당하면 내 인생 누가 책임져주냐”, “엄마뻘 이상은 무조건 구할 거고 2030 여자들은 흠칫하게 될 듯”, “여자는 여자가 구하라해”, “친한 여자 아니면 못 도와줄 거 같음”이라며 여성에게 CPR을 하기 꺼려진다는 반응을 보였다.

한 네티즌은 “한국 여자랑 엮이면 지옥의 시작”이라며 ‘한국 여자는 돕지 않는다’ ‘한국 여자는 가르치지 않는다’ ‘한국 여자는 관여하지 않는다’라는 ‘한국 여자 삼원칙’까지 만들기도 했다.

“미투 후, 남성들 성추행 문제에 예민해져”

남초 커뮤니티에서 심폐소생술과 젠더 문제를 엮는 이유에 대해 구정우 성균관대 교수는 “미투 운동 이후 남성들이 성추행 관련 부분을 예민하게 느끼고 조심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사건 직후 그런 반응이 나왔을 것”이라며 “그 자체를 두고 비난할 것은 아니지만, 사고의 위급성이나 시급성이 알려지고 정보가 제공된 이후에도 의도적으로 거짓 정보를 게시했다면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는 “해당 글의 경우 말 그대로 남초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며 이 역시 사회적 이슈가 발생할 때마다 등장해 비난·혐오·조작글 등으로 여론을 선동하려는 특정 움직임의 한 예시라고 봤다.

이어 “선동하는 사람은 과시하고 인정받고 싶어 한다. 대게 본인이 열등하니까 이런 식으로 자기가 우월하다는 걸 입증해 보이려는 것”이라며 “여기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나 같은 사람이 있구나’라는 걸 확인하며 불안감을 줄인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 문화 속에는 어떤 집단에 소속되길 원하는 분위기가 있다. 내가 열등하니까 우월한 집단에 소속되면 마음이 편해지고 더 인기 많은 집단에 소속되고 싶어 한다. 때문에 자극적이고 선정적인데도 자꾸 동조하게 되는 거다. 이때 선동 주체자들은 관심 혹은 경제적 이익을 위해 그 수위를 높이게 된다”고 덧붙였다.

구 교수 역시 “내가 이 사회와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건 기본적 윤리인데, 그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반감과 적대감을 갖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자신의 정체성을 알고 적절한 역할을 찾아야 하는데 그걸 망각한 결과”라며 “정보에 대한 욕구가 강한 탓도 있다. 정보를 생산하는 주체가 되고 싶은 욕구”라고 설명했다.

변호사 “심폐소생술이 강제추행으로 인정된 판례 없어”

법조계에서는 카카오 직원 글의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봤다.

법무법인 한일 추선희 변호사는“원칙적으로 생명이 위험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심폐소생술, 긴급한 처치만으로는 강제추행죄가 성립되지 않는다. 강제추행죄는 추행의 고의를 가지고 피해자의 신체를 접촉해야 하는 건데, 추행의 고의 없이 응급처치를 위한 신체의 접촉은 죄가 될 수 없다. 실제로 심폐소생술이 강제추행으로 인정된 판례도 지금까지는 없었다”고 했다.

물론, 심폐소생술로 고소를 당하는 경우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다.

2014년 남성 구급대원이 구급차 안에서 여성 환자의 유두를 만져 성추행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구급대원은 “피해자 의식을 확인하기 위해 흉골 문지르기를 했으나 반응이 없어 더 강한 통증자극반응검사방식인 유두자극방식을 실시한 것”이라고 했다.

이에 재판부는 “응급상황 당시 응급구조사가 그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방법이라고 판단해 시행하였다면 그러한 판단은 가급적 존중될 필요가 있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추 변호사는 ‘경찰이 합의하라고 했다’는 부분에 대해 “수사기관에서 합의하라고 하는 경우는 수사기관에서 보더라도 혐의점이 있어 보였다는 것”이라며 “글쓴이의 주장과 달리 실제 강제 추행, 상해의 고의가 인정될만한 증거가 있었을 거라 판단된다”고 했다.

‘합의금 800만원’에 대해선 “합의금은 당사자 간에 의사조율을 통해 정하는 것이긴 하지만, 통상적으로 해당 혐의로 인해 나올 수 있는 벌금·손해배상금과 비슷하거나 조금 높게 합의금을 정하는 것이 보통이다”라며 “800만원이라는 건 피고인과 그 변호인이 보기에도 무죄가 나올만한 상황이 아니었을까라고 말했다.

선고유예 처분에 대해선 “선고유예는 죄는 인정되지만, 피고인이 초범이고, 피해자와의 관계, 범행의 동기·수단·결과, 범행 후의 정황을 보았을 때 재범의 우려가 없는 경우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일정 기간 선고를 유예하고, 유예 기간 동안 추가 범죄가 없는 경우 형의 선고를 면해주는 제도로, 피고인을 선처해 주는 제도”라며 “카카오 직원에게 선고유예가 나왔다면 피고인이 초범이었고, 안정된 인적 관계를 유지(가족관계, 안정된 직장 등)하고 있어 추가 범행 우려가 없고, 피해자와의 합의 등으로 인해 재판부에서 예외적으로 선처를 해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성호 기자 shkim@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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