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여행자의 필요' 꼿꼿이 흐트러져 살아가리 [MD리뷰]

'여행자의 필요' 포스터 / 전원사
'여행자의 필요' 포스터 / 전원사

[마이데일리 = 김지우 기자] "홍상수식 유머 코드의 진수."

숨 막힐 듯 현실적인 대사에 웃음이 새어 나온다. 특유의 건조한 연출에 전작 이상으로 재치 있는 구성과 전달이 돋보인다. 삶을 대하는 방식에의 고뇌를 경쾌하게 풀어냈다. 90분 러닝타임 내내 지루하지 않게 몰입할 수 있다.

'여행자의 필요'는 프랑스에서 한국에 왔다는 이리스(이자벨 위페르)가 한국인들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치고, 막걸리를 마시며 생활하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제74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은곰상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다. 홍상수 감독의 다섯 번째 은곰상 수상작이자, 배우 이자벨 위페르와의 세 번째 만남이다.

영화는 티피컬한 한국인의 모습과 이방인 이리스의 모습을 병렬적으로 보여준다. 이를테면 각각 피아노를 연주한 이송(김승윤)과 기타를 연주한 원주(이혜영)는 소감을 묻자 '행복했다'고 말문을 연다. 이리스는 불어 수업 커리큘럼의 일환으로 그 감정을 파고든다. 이송과 원주는 '멜로디가 아름다웠다' '자랑스러웠다'에서 나아가 '사실 더 잘 하지 못해 짜증이 났다'고 고백한다. 이리스는 상투적 단어와 외부 시선에 갇힌 두 사람의 감정을 자기만의 언어로 깊고 풍성하게 풀어낸다. 그리고 그걸 입 밖으로 뱉어내는 방법을 알려준다. 불어로 말이다.

인국(하성국)은 근린공원에서 이상한 소리로 피리를 부는 이리스에게 호감을 느꼈다고 말한다. 연주를 잘하고 말고는 이리스의 관심사가 아니다. 이리스는 그저 막걸리를 좋아하고, 초록색을 좋아하고, 색이 예쁘다는 이유로 모나미 볼펜에 테이프를 둘둘 감아버리고, 맨발로 걷고, 동네 언덕의 바위에서 시간을 때우는 여자다. 집을 내어주고 함께해주는 고마운 인국에게 두 번의 불어 강습으로 번 20만 원 전부를 건넨다. 이리스에게 필요한 건 돈과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행자의 필요' 예고편
'여행자의 필요' 예고편

시인을 꿈꾸는 인국은 그런 이리스를 '진지하게 사는 사람'이라고 평한다. 외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느끼며 살아간다는 뜻이다. 이는 홍상수 감독이 밝힌 삶에 대한 견해와도 맞닿는다. 과거 홍상수 감독은 한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거의 없다. 그저 더 알기를 바라고, 아는 척할 뿐이다. 그래서 무엇을 하던 삶의 진실에 기반해 행동한다"고 했다. 작품에 등장하는 '서시' 등 윤동주의 시에서도 같은 맥락을 곱씹어 볼 수 있다.

시놉시스에 따르면 이리스는 불란서에서 '왔다는' 사람이다. 함께 사는 인국도 이리스가 어디서 왔는지, 무얼 했는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궁금해 보이지도 않는다. 두 눈으로 이리스를 바라볼 뿐이다. 그런 인국조차 외부 시선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듯 결국 "친구로서 사랑한다"고 선을 긋는다. 이에 이리스는 쌉싸름한 표정을 짓는다.

이리스를 제외한 각각의 캐릭터는 전형적인 군상임에도 매력 있게 살아 숨 쉰다. 홍상수의 한 끗일 수도, 배우의 역량일 수도 있다. 특히 인국과 그의 엄마를 연기한 하성국, 조윤희의 핑퐁은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 적나라해 PTSD를 유발한다. 그 와중에 꼿꼿이 흐트러져 살아가는 이리스의 모습은 알 수 없는 숲속의 바람처럼 숨통을 트게 한다. 이방인이자 여행자인 이리스의 필요가 있다면 그 때문이 아닐까. 목적 없이 나른하고 미묘하지만 그 자체로 보존되길 바라본다.

오는 24일 개봉.

김지우 기자 zwm@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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