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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데일리 = 강지훈 기자] 최근 들어서는 올림픽과 월드컵에 존재감이 많이 상쇄됐지만 한국이 올림픽과 월드컵에서 이렇다할 족적을 남기기 어려웠던 1980년대까지만 해도 아시안게임은 중국-일본과 정상을 다투며 수많은 명승부를 연출해 낸 대회였다. 올해로 16회째를 맞는 역대 아시안게임에서 한국이 따낸 금메달은 모두 541개.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메달이 없겠지만 그 중에서도 '백미'처럼 국민들의 추억 속에 끊임없이 회자되며 여전히 이야기되고 대회 후에도 상당한 파장과 영향력을 끼친 명승부들이 있다.
①1986년 서울아시안게임 남자탁구 단체전 - 단군 이래 최대 탁구붐을 낳다
한 때 한국 남자탁구선수들은 '백보이(Bag boy)'라는 불명예스런 별명으로 불렸다. 이미 세계를 제패한 여자탁구에 밀려 그녀들의 가방이나 들어준다는 오명이었다.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에서도 남자탁구는 금메달을 기대한 종목은 아니었다. '전진속공의 명수' 김기택이 부상으로 하차한데다 1979년 이래 단 한 번도 이겨보지 못한 세계최강 중공(중국)의 존재 때문이었다. 이 대회에서도 중공은 세계 1위 장지아량과 첸신화-후이준으로 이어지는 만리장성 라인업을 들고 나왔다. 한국이 남자탁구 단체전에서 36년만에 일본에 5-2로 승리하면서 사상 첫 은메달을 따게 됐다고 기뻐한 까닭이다.
운명의 9월 24일. 한국은 김기택과 '한국형 속공탁구'의 양 축이었던 김완, 떠오르는 스타 안재형, 그리고 18세의 샛별 유남규로 중공과 맞섰다. 홈 관중의 열렬한 응원을 등에 업은 한국은 안재형이 첸신화, 김완이 후이준-첸신화를 연파하며 기대이상으로 선전했고 5단식에서 안재형이 장지아량을 2-0으로 완파하는 이변을 연출하면서 9단식5선승제에서 4-1로 앞섰다. 이제 1게임만 이기면 대망의 금메달. 기적이 눈 앞으로 다가온 듯 했다.
하지만 세계최강 중공의 저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무너지기 직전에 연속 3게임을 잡아내면서 4-4. 오히려 분위기는 중공의 역전 쪽으로 흘렀다. 마지막 9단식은 안재형과 후이준의 맞대결. 오후 6시에 시작된 경기장의 시계는 어느덧 밤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세트 스코어 1-1에서 이어진 최후의 3세트. 7번의 동점과 2차례 역전이 오갔다. 1점, 1점마다 전국이 몇 초를 사이에 두고 함성과 한숨으로 들썩거렸다.
20-16, 이제 1점만 따면 한국은 사상 첫 금메달이 확정되는 순간. 후이준의 기습적인 스매싱이 엔드라인을 넘어 아웃되는 순간 안재형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고 엉엉 소리내 울었다. 그 위로 모든 선수와 코칭스태프가 뛰어들었다. 9시 뉴스도 미루고 11시 20분까지 생방송되며 전국을 뒤흔든 명승부였다. AP통신은 "어느 누가 봐도 이 경기는 스포츠사에 남겨질 명승부"라고 극찬했고 임주완 MBC 캐스터는 "만리장성이 무너졌다"는 유행어를 남겼다.
이 경기 직후 한국은 지금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탁구열기가 뜨거웠다. 탁구장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지만 기다리는 사람들의 줄은 늘어만 갔다. 소년들은 야구방망이와 축구공 대신 탁구라켓을 손에 들었고 직장인들은 점심내기당구 대신 내기탁구를 쳤다. 이 때의 열기는 한국이 1990년대까지 중국을 위협하는 탁구강국으로 자리를 굳히는데 커다란 역할을 담당했다.
[사진 = 탁구 커뮤니티 '고고탁' 캡쳐]
강지훈 기자 jhoon@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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