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종합
[교토대생의 교토이야기]나눠먹는 정을 느낄 수 있는 그곳
오월의 초록 아래서 학창시절 마지막 체육대회가 시작되었을 때는 유학시험을 100일도 채 남기지 않은 시점이었다. 남고의 가장 성스러운 행사인 체육대회에서 나는 비록 열심히 뛰지는 못했지만, 아쉬움이 남을 것 같아 담임선생님이 한 턱 내시는 뒤풀이엔 기어코 쫓아갔다. 땀냄새 속에서 삼겹살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내게, 선생님께서는 여러모로 걱정이 되셨는지 물으셨다.
“태범이 오늘 먹고 가도 괜찮겄어? 시간도 얼마 안 남고……”
“그럼요! 이게 다 먹고 살자고 하는 건데요 뭘!”
지금 돌이켜보면 열 아홉 살짜리 애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그려! 먹어야 힘을 내는 겨! 많이 먹고 가!” 하시며 등을 두들겨 주시던 선생님 모습이 너무나 선명하게 기억난다.
그만큼, 먹는 것은 중요하다!
잘 먹고 잘 지내는 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원하는 본능적 욕구다. 그래서일까, 한국에서는 “밥 먹었니?" 하는 물음이 인사를 대신하기도 한다. 일본에도 비슷한 말이 있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자란다는(よく食べよく寝てよく育つ) 말로, 주로 어린 아이들에게 쓰지만 “잘 자란다”는 말 대신 잘 웃고, 잘 놀고, 일도 잘한다는 말 등을 붙여서 어른들에게 쓰기도 한다.
며칠 전 내가 사는 맨션 입구에서 우연히 집 주인 아주머니를 만났을 때에도 아주머니께서 “잘 먹고 다니는 거니?” 하고 물으시길래, “그럼요, 잘 먹고 다니죠!” 하고 아주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도 그럴 것이 유학생인데다가 남자가 혼자 사는 생활이라 먹는 것도 뻔하겠거니 하고 걱정하셨을 것이 분명하다. 햄버거 같은 패스트푸드나 편의점의 인스턴트 음식으로 대충 끼니를 때우고, 조금 낫다면 한국의 김밥천국과 비슷한 느낌의 규동(소고기 덮밥)가게만 들락날락 거리는 모습이 눈에 선하셨을까? 하지만 자신 있게 잘 먹고 다닌다는 데에도 이유가 있다.
나는 요리를 곧잘 한다. 그렇다고 대단한 음식을 내는 것은 아니지만, 설날에도 일본에 남아있는 한국인 친구들과 떡국을 끓여 나눠 먹거나 든든한 밥 한끼 먹을 정도는 차려낼 수 있다. 가끔씩 사람들을 집에 불러 함께 식사도 하고 술도 한 잔씩 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시간이 좋다. 그 뒤에는 내가 자라온 배경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김연수의 소설 ‘뉴욕제과점’의 주인공은 ‘빵집 아들’로 성장기를 보낸 뒤에 이런 고백을 한다.
“나란 존재는 뉴욕제과점이 있던 거리에서 배운 것들과 그 거리 밖에서 배운 것들로 이뤄진 어떤 것이다.”
‘횟집 아들’로 10년 넘게 자라온 나도 이 문장에 공감할 수 밖에 없었다.
신선한 야채를 한 가득 싣고 장에서 돌아오시는 부모님의 모습, 매운탕이 끓는 매콤한 향과 감자전이 노릇노릇 익는 냄새가 한데 뒤섞인 분주한 부엌, 그 너머로 왁자지껄한 손님들의 테이블과 오가는 술잔. 그런 풍경이 아직도 눈앞에 생생하다.
나는 그렇게 함께 먹는 사람들의 행복한 순간들을 지켜봐 왔다. 같은 식탁에 마주앉아 음식을 나눈다는 의미로 식구(食口)라는 말을 쓰는 것을 보면 함께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먹는 일 이상의 끈끈한 정으로 사람들을 묶어주는 힘이 있다.
식구들과 떨어져 지내는 동안 내가 일본에서 그런 정을 나누는 곳은 역시 자코였다. 자코에서 사람들은 주인과 손님이 아닌 식구들로 모인다.
자코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든, 밥 한 끼를 먹든 아저씨 아주머니께서는 언제나 덤으로 조그마한 과자나 초콜릿 등을 주신다. 세상에 공짜 싫어하는 사람은 없으니, 주문한 것 이상으로 덤을 받으면 누구나 기분 좋게 과자를 한 입씩 베어 문다.
자코 사람들은 언제나 그 자그마한 정을 생각하며 출장이나 여행을 다녀올 때면 기념품으로 작은 과자나 선물 하나씩을 자코에 들고 온다. 그러면 아저씨 아주머니께서는 받은 선물을 다시 여러 손님들에게 덤으로 나누어 주시니 결국 뭐든지 함께 나눠먹는 모양이 된다.
그 속에서 나는 방학 때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빼면 여행도, 출장도 없는 몸이기에 얻어먹기만 하는 처지가 된다. 항상 받기만 하는 것이 죄송스럽기도 해서 될 수 있는 대로 이것저것, 자코에 갖다 드려야지 생각하며 지낸다. 가끔 부모님께 소포로 받는 가래떡, 미숫가루, 고추장, 김 등을 조금씩 갖다 드리면서 이것저것 설명해 드리기도 한다.
언젠가 한 번 배를 싸게 팔길래, 배숙을 만들어 자코에 가져간 적이 있다. 손이 많이 가지도 않고 짧은 시간에 만들 수 있는데다, 우리 전통음료이기도 하니 여러모로 좋겠다 싶어 가져갔는데, 그날 따라 자코엔 손님들도 꽤 계셨다. 자코 아저씨, 아주머니도 처음 보는 음료가 신기하셨는지 “태범군이 만들어 온 한국 음료”라고 소개를 하시면서 손님들께 한 잔씩 나누어 드리기 시작했다.
식후에 떡과 함께 먹는 디저트 같은 음료라고 대충 설명을 해 드렸더니, 와인 잔에 배숙을 담아 오셔서,
“뭐 이런 식으로 내주면 되는 건가?”
하시길래 어딘가 어색하기는 했지만 아니라고는 말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배숙의 반응은 생각보다 좋았다. 그 자리에서 어떤 아주머니께서 “할머님이 배 농사를 하셔서 집에 배가 남아돈다”고 하시며 배숙 만드는 법을 알려달라고 하시길래 곧바로 메모지에 적어드렸다. 그리고 한국 배와 일본 배의 차이, 한국 전통 음료는 또 어떤 것들이 있나, 김치 이야기 등등, 음식 이야기로 한바탕 이야기 꽃을 피웠다.
역시 아주머니들과 이야기 할 때는 역시 음식 얘기가 제일이다. 먹어 본 음식 얘기, 지금 먹는 음식 얘기, 앞으로 먹을 음식 얘기만 해도 끝도 없이 이야기가 이어지고, 각자 자기만의 비법 같은 것을 공유하면서 금새 친해지기도 한다.
자코 아저씨, 아주머니와도 음식 얘기를 하면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신나게 얘기하는 날이 많다. 물론 어느 정도 한국 음식엔 내공이 쌓이신 분들이기에 이야기의 주제도 난이도가 꽤 있는 ‘고급’에 속한다. 고등어 조림, 장어구이, 호박죽, 단팥죽, 도토리묵, 떡국 등 최근의 대화 주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런데 이런 얘기를 하다 보면 아주머니는 꼭 이것저것 싸주시고, 나는 또 받기만 한다.
며칠 전 단팥죽 얘기를 할 때에도, 아주머니께서 팥 앙금을 토스트에 발라서 먹어도 맛있고 흰 떡에 찍어먹어도 맛있다고 하시다가는 대뜸 “팥 앙금 좋아해?” 하시더니 부엌에서 팥 앙금 통조림을 하나 가져오신다. “괜찮아~ 가져가~” 하시는 두 분께 “오늘도 받기만 해요~ 잘 먹겠습니다.” 하며 넙죽넙죽 받아오는 것들이 사실 한 둘이 아니다.
▲ 얼떨결에 팥앙금을 또 얻어왔다. 토스트에 발라 먹어도 맛있다고 하시며 쥐어주셨다. ©김태범술지게미(쌀로 술을 빚은 후에 술을 짜고 남은 찌꺼기)를 주시면서 술지게미로 국 끓이는 법을 알려주시기도 하고, 우메보시(매실 절임) 같은 밑반찬도 받아오고 큐슈의 유명한 숯불구이 닭고기도 얻어먹었고, 벌써 다 먹어 치우고 잊어버린 것들도 꽤 있을 테다. 이쯤 되면 내가 자코에서 밥을 사 먹은 것 보다 그냥 받아온 음식이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 술지게미. 자코에서 술지게미를 얻어오기 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재료. ©김태범 ▲ 술지게미로 국을 끓인 어느 날의 밥상. ©김태범그 중에서도 가장 감사하게 받는 것은 직접 키우신 야채들이다. 집에서 작은 화분으로 키우시는 여주 열매(ゴーヤー) 같은 야채는 작고 못생기기는 했지만 신선하고 농약걱정 없는 것들이다. 아마 슈퍼 진열대에 올라가게 된다면 유기농이다 뭐다 해서 꽤나 비싼 값에 팔려나가겠지만, 나는 넙죽 받아와서 돼지고기와 같이 볶아먹고, 찬밥으로 볶음밥도 해 먹었다.
몇 달에 한 번씩은 종이가방 한 가득 신문지에 고이고이 싸 놓은 야채를 담아 주시는 날이 있다. 바로 자코 아주머니의 어머님께서 농사지으신 소중한 야채를 주시는 건데, 봄에는 죽순을 몇 개 챙겨 주시기도 하고, 가을엔 고춧잎 같은 별미를 싸 주시기도 한다. 그것 말고도 부추, 시금치, 당근 등등 아직 흙이 묻은 채로 파릇파릇한 야채들을 한 가득 받아오면 ‘이걸로 뭘 해먹을까……’ 하는 즐거운 고민에 빠진다.
▲ 부추, 시금치와 함께 제철인 죽순을 얻어오기도 했다. ©김태범어떤 말 보다 더 많은 것을 전하는 행동이 있다.
외할머니 댁에 갈 때마다, 할머니께서는 자식들 손주들 먹을 것 싸주시기에 바쁘셨다. 참깨 볶은 것에, 들기름, 고구마, 미숫가루, 가래떡에…… 꺼내도 꺼내도 계속 나오는 광경을 보다못해 엄마는 몇 마디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엄니 뭘 그렇게 많이 주셔~ 다 못 가져가~”
할머니께서 “너네 주려고 챙겨둔 거여” 하시면서 서운한 기색을 보이시기에, 결국 손에 쥐어주시는 보따리고 비닐봉투고 전부 차에 실어 나른다. 할머니에게는 몇 마디 말보다 고구마 한 자루가, 들기름 한 병이 더 깊은 마음의 표현일 지 모른다.
▲ 시금치, 부추, 당근, 고추, 고춧잎까지. 넉넉한 인심이 한가득이다. ©김태범자코에서 시골 풍경을 보았다. 야채 보따리를 쥐어 주시는 마음을 이제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다.
김태범(교토대학 2학년)
곽소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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