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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의 지배자'에게 가해진 이념적 공격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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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가 8집 활동을 마친지도 1년이 넘었다. 그동안 그는 몽골에 여행을 다녀왔다. 그리고 그곳에서 겪은 경험을 자양분으로 한창 음악작업을 하고 있을 것이다. 좀 이르다 싶지만 슬슬 컴백을 예상하는 기사들도 나오기 시작했다.
음반이 나온 연도를 기준으로 하면 이제 만 3년째가 되어가기 때문이리라. 그래도 내 생각엔 아직 이르다. 내가 보기엔 이런 기사들이 수 백개는 쌓여야 비로소 컴백이 발표될 것이고 또 그 예정일을 하루하루 기다리는 나날 또한 계속될 것이다. 그의 새 음악을 듣기 위해선 인내심은 필수요 기다림은 옵션이다.
생각난 김에 그의 발자취를 돌아봤다. 언제부터 나는 그가 이 시대의 혁명가가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전설이 되어버린 역사의 지배자임을 인정하게 되었던 것일까? 그에 대한 최고의 존칭이었던 '혁명가'는 과연 그에게 적절한 수식어였던 걸까.
순간, 그에게 덧씌워진 선입견과 이미지들이 떠올랐다. 혁명가, 메시아, 신비주의, 미국음악 추종자, 사탄 숭배자 등등. 90년대 문화현상의 핵이었던 이에게 맞지 않는 수식어들. 지나치게 거창하거나, 또는 지나치게 비하적이거나. 지극히 극과 극의 이미지가 그에게 달라붙어 있었다. 왜 그런 것일까? 난 그에게 덕지덕지 붙은 수식어들 속에서 좌우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분열을 느낀다.
록음악으로 조문정국까지 돌파한 서태지의 힘
진보를 자처하는 이들에게나 보수를 자처하는 이들에게나 서태지란 존재는 기이하고 도전적인 존재였기 때문이었을까? 한편으로는 당시에 보여준 그의 영향력이 대중음악계를 넘어선 전 사회적인 것이었음을 방증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김일성 조문파동에 따른 후폭풍이 극에 달한 시점임에도 그는 '발해를 꿈꾸며'와 '교실이데아' 라는 곡을 내세워 사흘만에 백만장이 넘는 음반 판매고를 올렸다. 국론분열이 극에 달한 시점을 피하지 않고 정면돌파한 것은 대담하다 못해 무모하다. 게다가 사회문제적 이슈가 담긴 비주류 록음악을 내세운 발상은 전복적이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단 사흘만에 백만장의 음반 판매고를 올렸다. 그만큼 그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서태지에게 사회적, 이데올로기적 수식어들이 달라붙게 된 본격적인 시발점은 아마도 그가 서태지와 아이들 3집을 발매한 1994년 8월부터가 아닐까 싶다. 위에도 언급했듯이 그가 내놓은 3집 앨범은 전작들이 보여준 파격성과는 차원이 달랐다.
전작들이 장르의 선입견 파괴와 퍼포먼스에서의 파격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면, 3집 앨범은 교육문제와 통일이라는 사회적 이슈를 전면에 내세웠다. 통일과 교육문제, 그는 10대를 위시한 젊은 세대들이 함부로 말할 수 없었던 주제의 금기를 깼다.
가사와 각종 인터뷰에서도 볼 수 있지만, 그는 특별한 이론과 사상을 가진 것이 아니었다. 단지 음악적 표현을 다양하게 하기 위한 포석으로 '교실이데아'와 '발해를 꿈꾸며'를 만들었다. 마치 핑크 플로이드의 역작인 'Another brick in the wall' 같은 곡처럼 자국의 교육현실과 사회적 문제들을 음악적 표현에 담아내고자 하는 단순한 의도였을 게다.
음악적 표현의 범위를 확대시키기 위해서. 그게 아니라면 서태지 특유의 엔터테인먼트적 센스에 의한 작품이었을지도 모른다.
서태지에게 가해진 전근대적 공격들
안타깝게도 그가 3집 앨범에서 보여준 파격은 이내 이데올로기적인 표현으로 오해되었다. 그런 이유로 앨범발매 직후 기성세대와 보수주의자들은 서태지와 아이들을 노골적으로 공격했다. 그들의 이념적 공격은 한국 특유의 문화지체 현상과 맞물려 그 폭발성이 배가됐다. 그들에게 서태지는 10대들을 망치는 주범이었고 미국의 양아치 문화를 전파하는 전통 파괴범이었다.
수록곡 교실이데아에서 '피가 모자라'라는 악마의 목소리가 들린다는 '악마숭배 소동'은 보수주의의 폭발력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지금의 눈으로 당시를 보자면 이러한 공격은 지극히 저열하고 촌스러운 것이었다. 게다가 종교적 의식을 덧붙여 전 근대적이기까지 했다. 공격이 더해질수록 그의 상처는 깊어만 갔다. 당사자의 인터뷰를 보자.
"심지어는 자기가 다니는 교회의 목사님이 '너희들이 정말 서태지를 위한다면 그가 악마의 굴레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자식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하라'는 요지의 설교도 했다고 한다. 언젠가 국회에서도 서태지가 이 땅의 자녀들을 다 버린다는 발언이 나온 적이 있는데, 정말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에 어처구니가 없다. 청소년들의 우상이 되는 것이 이토록 상처입어야 하는 것인가?" <리뷰> 1994년 겨울호 '서태지, 주류 질서의 전복자' 178~201p
그에게 씌워진 혁명가의 굴레
반면, 문화적 진보를 자처하는 쪽도 그에게 상처를 준 것은 마찬가지인 듯싶다. 그들은 그가 가진 음악적이고 엔터테인먼트적 측면을 애써 외면하고 그가 가진 파격성을 사회적 혁명으로 부각시키는 데에 집중했다.
그들은 그의 음악의 특징인 사회비판적 표현을 '사회비판을 위한 음악적 표현'으로 왜곡시켰다. 사회비판을 위한 음악과 다양한 음악을 위한 사회비판적 표현은 엄연히 그 뜻이 달랐지만 그들은 개의치 않았다. 보수주의자들에게 서태지가 정으로 때려야 할 '모난 돌' 이었다면, 진보주의자들에게 있어서 그는 '혁명성을 가진 순수한 투사'로 기록되어야만 했다.
문화평론가 이영미는 <시사평론 길>에 서태지의 파격성을 엔터테인먼트적 요소로 설명하는 기고문을 올렸다가 편집부에서 글이 삭제된 경우도 있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기고문 삭제의 원인을 서태지의 혁명을 상술로 격하시킬지도 모른다는 편집부의 생각에 따른 것이라 말했다(이영미, 'TV 가요와 언더그라운드 가요의 껴안기' <사회평론 길> 1994).
보수주의자들이 서태지에게 준 상처가 지극히 전근대적이었다면 진보주의자를 자처한 이들이 그에게 준 상처는 지극히 교조주의적인 것이었다.
이제는 음악 좀 듣고 그를 논해보자
이제 그는 혁명가가 아니다. 지금의 세대들은 서태지가 누군지조차 모를 것이다. 그런 이유로 이제는 그를 색안경 없이 볼 수 있는 때가 왔다. 실제로 그런 그에 대한 매스미디어의 반응은 이제 사뭇 호의적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가 컴백할 즈음이면 우리는 이러한 오해들의 잔영들을 아직도 게시판 리플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여기에 '돈 없으면 한국온다', '미국음악 앵무새' 등의 비아냥 등이 더해지고 그러한 댓글로부터 그를 지키기 위한 팬들과의 싸움으로 인해 게시판은 언제나 난장판이 된다. 서태지는 언젠가 사서함을 통해 표절논란이 차라리 반갑다 했다. 그것은 의도와 상관없이 순수하게 자신의 음악만을 논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음악가에 대한 음악적 평가 없이 이념적 매개로 그를 논하는 것은 얼마나 공허하고 무의미한가. 음악적 평가는 뒤로 한 채 그에 대한 사회적 평가를 놓고 목숨을 걸던 시절. 이제는 그를 음악만으로 듣고 느낄 수 있는 때가 왔다.
박종원 (pjw1986)
문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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