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마이데일리 = 고동현 객원기자] 한국 사회에서 1997년은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다. 1997년 말 시작된 IMF 외환위기는 많은 이들을 아픔으로 몰아 넣었다. 야구계에도 1997년은 특별한 한 해였다. 하지만 그 의미는 전혀 다르다.
1997년은 한국야구를 상징하는 두 명의 선수가 자신의 이름을 확실히 각인시킨 한 해였다. 이후 그들 이름 앞에는 '코리안 특급'과 '국민 타자'란 수식어가 항상 따라 붙었다. 박찬호와 이승엽이 그들이다.
박찬호의 1997년은 자신의 입지를 확실히 다진 한 해였다. 1996시즌 중간계투로 메이저리그에 연착륙한 그는 이듬해인 1997시즌부터 풀타임 선발투수로 활약을 시작했다. 14승 8패 평균자책점 3.38가 1997시즌 그의 성적이었다. 그가 완투승을 거두고 환호하는 모습은 한동안 애국가의 한 장면을 장식했다.
이후 박찬호는 때로는 메이저리거로서, 때로는 국가대표로서 자신과 국가의 명예를 드높이며 한국 야구를 대표하는 선수로 자리 잡았다.
이승엽에게도 1997년은 절대 잊을 수 없는 한 해다. 타율 .329 32홈런 114타점을 기록하며 최연소 홈런왕은 물론이고 정규시즌 MVP에 오른 것. 4차례 MVP, 5차례 홈런왕의 시작이었다. 그 때 이승엽의 나이는 불과 21살이었다.
이후 그는 한국 프로야구 홈런 역사를 연일 갈아 치우며 '국민 타자'라는 수식어를 얻었다. "안녕하세요, 홈런왕 이승엽입니다"라는 멘트는 성대모사의 단골소재가 되기도 했다.
13년 후인 2010년. 그들의 이름에 대한 무게감은 여전하다. 하지만 이름값에 비해 그들의 2010년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일본 프로야구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활동했던 이승엽은 이렇다 할 기회도 얻지 못한채 씁쓸하게 시즌을 마쳤다. 그리고 그에게 돌아온 것은 '퇴단' 통보였다.
핀스트라이프 유니폼을 입고 야심차게 시즌을 시작한 박찬호도 올시즌이 쉽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메이저리그 동양인 최다승 기록을 갈아치우는 것으로 모든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이렇듯 이들의 위상이 예전같지 않다하더라도 박찬호와 이승엽의 만남은 누구도 쉽사리 생각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한국 야구를 대표하는 두 존재의 결합은 그야말로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일인 것처럼 느껴졌다.
한국 프로야구를 거쳐 일본에서 뛰던 이승엽과 메이저리그에서만 15년 넘게 뛴 박찬호가 같은 리그, 그것도 같은 팀에서 뛸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다. 국가대표에서조차 이들은 2006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단 한 차례 만났다.
그러나 세월은 꿈을 현실로 만들었다. 명예회복을 벼르는 이승엽, 선발투수에 대한 로망과 현실적 이유로 새로운 도전에 나선 박찬호, 명분과 실리 모두 얻으려는 오릭스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결과였다.
이러한 모습이 언제까지 될지는 알 수 없다. 박찬호가 "한국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하고 싶다"고 공언한 이상 두 명의 '야구영웅'이 뭉친 모습은 단 1년만 볼 가능성이 가장 높다. 그렇기에 '박찬호'와 '이승엽'이라는 선수가 한 팀에서 뛰는 내년 시즌은 먼 훗날에도 야구팬들에게 계속 기억될 것으로 보인다.
흐르는 시간은 예전 박찬호와 이승엽의 '위압감'을 가져간 대신 모든 야구팬들이 한 번쯤 꿈꿔봤을 법한 일을 현실로 만들어줬다.
[사진=오릭스에서 한솥밥을 먹게 된 박찬호(왼쪽)와 이승엽]
고동현 기자 kodori@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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