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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의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
[마이데일리 = 김경민 기자]‘세기의 미녀’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향년 79세를 일기로 타계한 가운데, 그의 삶이 새롭게 주목을 받고 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1932년 영국 런던 햄스테드에서 미술 관련 사업을 하던 프란시스 랜 테일러와 사라 비올라 웜브로드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영국에 거주 중이지만 미국인으로, 테일러 위로는 3살 터울의 오빠 하워드가 있었다.
테일러의 모친 사라는 배우 출신으로 결혼 전 사라 소던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지만 프란시스와 1926년 결혼 후 은퇴 했다.
그의 이름은 할머니를 딴 것으로, 테일러의 이름은 엘리자베스 마리 로즈먼드다. 영국에서 태어난 테일러는 3살 때부터 발레를 배우는 등 일찍부터 예술가로 자질을 키워왔다.
이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테일러 일가는 전화를 피해 미국으로 돌아와 로스앤젤레스에 자리를 잡는다.
그의 전설은 일찍부터 시작됐다. 1942년 ‘There's One Born Every Minute’의 단역으로 영화 데뷔했한 그는 실질적인 데뷔작 ‘용감한 래시’(Lassie Come Home, 1943)로 은막에 모습을 드러낸 테일러는 이후 몇 편의 작품을 거쳐 최대 제작사인 MGM사와 전속 계약을 맺게 된다.
테일러는 ‘내셔널 벨벳(National Velvet 1944)을 통해 400만 관객을 동원하면서 흥행 배우로 올라서게 된다.
이후 테일러는 ‘작은 아씨들(Little Women 1949), ‘젊은이의 양지’(A Place In The Sun 1951), ‘아이반호(Ivanhoe 1952)‘자이언트(Giant 1956) 등을 통해 다양한 작품에 출연했다.
테일러는 아카데미상 수상 외에도 노미네이트 된 작품이 많기로 유명하다. ‘레인트리 카운티(Raintree County 1957),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Cat on a Hot Tin Roof 1958), ‘지난 여름 갑자기(Last Summer 1959)로 아카데미상에 이름을 올렸다.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것은 러닝타임 240분의 대작 ‘클레오파트라(Cleopatra 1963)다. 테일러는 이 영화를 통해 사상 최초로 1백만 달러의 개런티를 받는 배우가 됐다.
이후 테일러는 오랜 기간 은막의 스타로 활동했다. ‘말괄량이 길들이기 (La Bisbetica Domata The Taming Of The Shrew 1967), ‘화려한 사랑(Zee And Co. X, Y And Zee 1972), ‘토스카니니(Il Giovane Toscanini Young Toscanini 1988)등 나이 듦에도 불구하고 영화에 대한 열정을 숨기지 않았다.
무려 40여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최고의 배우로 활동하던 그는 1993년 아카데미시상식에서 평생공로상을 받았고, 2000년 초반 이후 연기 활동을 중단했다.
그는 영화 뿐만 아니라 각종 사회 운동가로도 활동해 왔다. 1985년 에이즈 기금 운동을 시작한 그는, 1999년 자신의 이름을 딴 에이즈 퇴치단체 설립한다. 영국 정부는 스크린과 사회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해온 그를 기려 데임(Dame)작위를 수여했다.
또 테일러는 2009년 세상을 떠난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의 죽음을 애도하는 모습이 언론에 공개가 되며 그와의 깊은 우정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은퇴 이전인 지난 1997년에도 뇌종양 제거 수술을 받은 테일러는 2009년에는 심장 판막 수술을 받는 등 큰 위기를 두 차례나 넘겼다.
하지만 지난달 울혈성 심부전증으로 병원에 입원한 그는 수차례 피해갔던 죽음을 이번에는 벗어나지 못했다.
세기의 미녀이자 만인의 연인이 진정 저 하늘의 별이 되는 아쉬운 순간이었다.
[사진 = '용감한 래시' – '말괄량이 길들이기'(위 사진),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클레오파트라'(가운데 사진), '버터필드8'-'토스카니니'(아래 사진)]
김경민 기자 fender@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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