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종합
[김상하의 일본엿보기] 일본식 월정액제의 미스터리
일본에서 생활하다보면 여러가지 문화적 차이와 관습의 차이에 쉽사리 적응이 안 될 때가 많다. 특히 이런 관습적인 차이가 돈과 관계된 문제일 때는 더욱 납득하기 힘들어 질 때가 많다. 그 중에서도 가장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던 것이 바로 ‘월정액 요금’ 시스템의 차이였다.
한국인이 일본에 와서 이러한 월정액 시스템을 만나게 될 일은 많지 않다. 일본에서 1~3년 정도 머물다 가는 대부분 유학생의 경우에는 일본식 월정액 시스템을 이용할 기회가 많지는 않다. 하지만 일본에서 장기간 거주하거나, 유학이 아닌 취업 등으로 일본에 와서 장기간 거주하면서 일본인들과 똑같은 서비스들을 이용하기 시작하면 월정액 시스템의 황당함을 경험하게 된다.
내가 처음으로 이 시스템을 경험하게 된 것은 후지TV의 VOD 서비스인 FOD(후지TV온디멘드) 사이트에서였다. 이 사이트는 공중파로는 방영하지 않는 위성방송용 컨텐츠를 유료에 판매하는데, 대부분 방송 1회분 단위로 판매를 한다. 1회분에 105엔~300엔이나 하고 관람 유효기간은 대개 7일 정도에 불과하다. 너무 비싸기 때문에 대개는 하나의 프로그램을 한달 내내 무제한 볼 수 있는 정액권을 구매하게 된다. 정액권은 방송당 1050엔 정도 하기 때문에 이쪽이 훨씬 저렴하다. 그런데, 이 정액권을 구매하면서 아주 황당한 경험을 하게 된다.
이때가 아마도 그달 20일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다음 달 1일이 되자 방송을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정액권을 구입할 때 귀찮아서 대충 넘겼던 주의사항을 다시 꼼꼼하게 읽어보았다. 그리고 알게 된 사실은 그 곳의 정액권은 언제 구매했건 무조건 구매한 달 말일을 끝으로 소멸된다는 것이었다.
한국인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방식이었다. 보통 20일에 결제했다면 30일 후인 다음 달 19일에 정액권의 유효기간이 끝나야만 한다. 그래서 한국은 보통 ‘30일 정액권’이라는 표현을 쓴다. 그런데 일본은 말 그대로 ‘월액정가권’이었던 것이다.
이어서 상당히 오랫동안 다녔던 헬스클럽 회원을 탈퇴하면서 같은 경험을 하게 된다. 월정액으로 몇 년 동안이나 다녔던 헬스클럽이었는데, 탈퇴할 때는 신청한 날 바로 탈퇴가 안된다는 것이었다. 물론 여기까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한국 사람이라면 느끼는 또 하나의 황당한 규정이 나온다. 바로 매달 10일을 기점으로 10일 이전에 탈퇴 신청을 하면 당월 말에 탈퇴가 되지만, 10일 이후에 탈퇴 신청을 하면 다음 달 말까지 회원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11일에 탈퇴 신청을 하면 그 다음달 사용료까지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 생활이 길어지면서 이런 시스템이 일본에서는 관습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어 이 이상한 룰에 대한 의문을 갖는 사람이 그다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회사에서 내가 만든 사이트도 결제 방식은 위에 소개한 FOD의 결제 방식과 거의 동일한 방식을 적용하게 되었다.
왜 이런 방식을 사용하는지를 상당히 많은 일본인 친구들에게 물어봤지만 누구도 명확하게 해답을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는 이런 결제 방식에 대해 ‘야후지혜주머니’나 ‘goo알려줘요’ 같은 지식검색 서비스에조차 등록된 질문이 없었다. 그래서 내 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아마도 이건 수십년 전부터 이어져 오던 장부 결산 방식의 잔재가 아닐까 하는 것이다. 매월 정해진 결산일을 기준으로 장부를 정리하는 구시대적 관습이 인터넷에도 그대로 남아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분명한 것은 이런 특정일을 기준으로 끊어서 일괄 처리하는 방식이 트러블이 생길 소지는 적다. 가입한 날짜부터 계산해서 매일 서비스 만료를 맞은 회원을 시스템에서 처리하는 것보다는 한 달에 한번 일괄정리하는 것이 서비스를 운영하는 입장에서는 좀 더 편리하다.
재미있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 월세는 퇴거한 날까지만 월세를 1/n 해서 지불하는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굳이 월세가 아니라도 금액이 큰 경우에는 앞서 이야기한 관습이 적용되지 않는다. 월정액을 말일로 끊는 시스템은 대부분 1만 엔 이하 소액 결제에 한해서다. 이것은 아마도 금액이 큰 경우에 그런 운영 편의적인 시스템을 적용했다가는 더 많은 트러블을 겪게 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도 이제는 일본식 월정액제에 적응되어 별 거부감 없이 관습을 따르게 되었지만, 마음 속에는 여전히 큰 의문이 남아 있다. 돈 문제가 얽혀 있다보니, 억울한 건 억울한 거니까.
글 | 김상하 프리라이터
(김상하씨는 현재 일본 도쿄에 거주중으로 만화, 애니메이션, 일본서브컬쳐 정보를 발신하는 파워블로거이자, 뒷골목 엔터테인먼트 뉴스 j-enter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김상하씨 블로그: http://blog.daum.net/kori2sal/6235775
제이엔터: http://www.j-enter.net/
곽소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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