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마이데일리 = 김진성 기자] 쿠세도 단계와 확률이 있다.
넥센 염경엽 감독이 3일 목동 두산전을 앞두고 흥미로운 얘기를 꺼냈다. 염 감독은 올 시즌 초반 모든 팀이 활발하게 기동력 야구를 펼치는 것을 두고 “투수의 피칭 폼을 읽었다기보다는 나름대로의 승부를 건 것이다”라고 해석했다. 예를 들어 투수가 다리를 드는 높이와 고개의 방향, 각도 등을 통해 도루할 타이밍을 잡았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주자와 주루코치가 투수의 ‘쿠세’(버릇)를 잡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염 감독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누구나 볼 수 있는 단계”라고 했다. 누구나 쿠세를 볼 수 있는 단계에선 투수도 얼마든지 수정이 가능하다는 게 염 감독의 설명이다. 때문에 염 감독은 시즌을 치열하게 치르는 과정 속에서 좀더 높은 수준의 쿠세를 잡아내야 승부를 유리하게 가져갈 수 있다고 봤다.
▲ 쿠세의 중요성
현대야구는 쿠세 전쟁이다. 투수의 버릇을 파고 들면 주자가 도루를 성공할 확률이 높아진다. 리드폭도 깊숙하게 가져갈 수 있다. 타자도 당연히 안타 확률이 높아진다. 염 감독은 “투수의 쿠세를 알면 직구, 슬라이더, 체인지업, 커브에 모두 대비할 이유가 없다. 그 공 하나만 알고 노리면 된다”라고 했다. 노림수 타격을 하면 당연히 안타 확률이 높다.
유독 특정 투수에게 강한 타자가 있다. 쿠세의 영향이 없다고 보긴 어렵다. 물론 투수도 쿠세를 알고 고치려고 노력한다. 염 감독도 “상대팀 쿠세를 보기 전에 우리팀 투수들부터 쿠세를 최소화하라고 한다”라고 했다. 하지만, 절체절명의 승부처에서 고유의 버릇이 완전히 사라지긴 어렵다. 염 감독은 “국내에서 투수 쿠세를 가장 잘 잡는 타자는 이진영(LG)과 이병규(LG)”라고 했다.
도루도 마찬가지. 투수의 세밀한 버릇을 알면 도루할 타이밍을 찾기가 쉽다. 발이 느린 주자도 과감하게 도루를 시도할 수 있다. 벤치에서도 런 앤 히트 등의 사인을 내기가 수월해진다. 1루코치가 투수의 버릇을 파악하면 곧장 벤치와 공유하기 때문이다. 확실히 쿠세를 파악하면 승부가 유리해진다. 지난해와 올 시즌 초반 흐름은 확실히 타고투저다. 쿠세 노출과 파악, 보완의 영향도 있다고 봐야 한다. 특히 올 시즌 초반 외국인투수들은 현재 기존의 습관을 각 팀에 노출하는 단계다. 물론 이 단계가 지나면 코칭스태프와 함께 보완 과정에 돌입할 것이다. 진검승부는 그 이후다.
▲ 쿠세의 단계
김성근 고양 원더스 감독은 일전에 “A투수는 직구를 던질 땐 팔 주름이 2개 잡히고, 변화구를 던질 땐 팔 주름이 3개 잡힌다. 바지 무릎 선의 주름으로도 구종을 알 수 있다”라고 했다. 염 감독은 웃으며 “그건 5단계”라고 했다. 아무도 못 보는 단계라는 의미다. 실제 벤치에서 투수의 팔 소매와 유니폼 하의에 주름이 잡히는지 확인하는 건 쉽지 않다. 투수가 글러브 안에서 그립을 잡은 상황에서 손에 힘을 줄 때에만 팔에 주름이 잡히기 때문이다. 그립을 잡아도 손에 힘을 풀면 팔 소매에 주름은 생기지 않는다. 때문에 주름은 찰나의 순간을 잘 포착해야 확인할 수 있다. 염 감독은 “쿠세에도 단계가 있다. 1단계가 투수의 고개 방향과 팔, 다리 높이 등 누구나 볼 수 있는 단계라면, 5단계는 몇몇의 사람만 볼 수 있는 단계”라고 했다.
염 감독은 각팀 전력분석원 중에서 5단계 쿠세까지 볼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팀 별로 1~2명은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5단계 쿠세를 볼 수 있는 사람들은 타 팀 투수들의 쿠세를 분석하면서, 자기 팀 투수들의 쿠세도 분석해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지금도 모든 투수들이 쿠세를 없애는 노력을 하고 있고, 주루 코치들과 타자들은 타 팀 투수들의 쿠세를 찾아내기 위해 전쟁 중이다. 최근 일부 투수들은 추운 날씨에도 딱 붙는 기능성 광택 언더웨어(흔히 쫄티)를 입지 않기도 하는데, 아무래도 쿠세를 노출당하지 않기 위한 목적도 있다고 한다. 어쨌든 습관과 버릇이 없는 투수는 없으니 말이다.
염 감독은 “난 1할대 타자였다. 만년 백업이었다”라면서 선수시절 벤치에 앉아있을 때 딱히 할 일이 없어서 상대 투수의 쿠세를 지켜보기 시작했다고 회상했다. 염 감독은 “태평양 시절 박종훈 코치(전 LG 감독, 현 NC 육성이사)에게 내가 분석한 쿠세를 말씀드렸더니 깜짝 놀라더라. 그래서 LG에서 코치를 한 것”이라고 껄껄 웃었다. 염 감독의 예리한 관찰력은 지금도 야구계에서 유명하다. 넥센 타격이 좋은 이유도 염 감독의 예리한 관찰력이 투영돼있다. 염 감독은 “몇몇 투수들이 우리 타자들에게 고전하는 건 이유가 있다”라고 웃었다.
▲ 쿠세의 확률
염 감독은 “쿠세에도 확률이 있다. 타자가 직구 혹은 변화구를 미리 알더라도 대처방법은 또 다른 문제”라고 했다. 예를 들어 “투수의 공이 직구라는 걸 알고 무작정 풀스윙을 하는 타자는 2할5푼대 타자”라고 했다. 직구인 걸 알기만 할 뿐, 코스와 높낮이를 모르면 무용지물이라는 것. 직구라고 해도 터무니 없이 높은 직구에 헛스윙을 하면 결국 삼진이나 범타로 물러날 확률이 높다. 그리고 코너워크가 잘 된 직구는 알고도 치기 힘들다. 변화구 역시 마찬가지다. 구종을 알아도 공이 홈 플레이트에서 흐르는 방향과 타격 타이밍을 잘 잡는 게 우선이다.
염 감독은 “100% 쿠세는 없다. 쿠세를 완벽하게 알아도 언제든 당할 수 있다. 보통 70% 정도의 확신을 하면 승부를 거는 것”이라고 했다. 한편으로 염 감독은 “쿠세를 유난히 잘 보는 타자가 있다. 그런 타자에겐 코치들이 팁을 주지만, 쿠세에 신경을 쓰지 않거나 무감각한 타자는 아예 신경을 쓰지 않는 게 좋다”라고 했다. 쿠세 자체를 의식하지 않고 흔히 말하는 ‘공 보고 공 치기’를 하는 타자에게 괜히 쿠세를 알려줬다가 오히려 헷갈릴 수 있다는 것. 어차피 쿠세에 100% 정답은 없고 타자 고유의 리듬을 흔들 이유는 없다는 의미다.
최근에는 쿠세를 역이용하는 지능적인 투수도 있다. 주자와 타자가 투수의 특성을 100% 알고 승부에 임하더라도 결국 투수가 공을 던져야 진행되는 게 야구다. 쿠세를 아는 타자는 아무래도 욕심이 생긴다는 게 염 감독의 설명. 지나친 욕심은 좋지 않은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글러브 속에선 직구 그립을 세게 쥐어 언더웨어 팔 소매에 쿠세가 드러났는데, 막상 공을 던지는 과정에서 그립을 바꿔 변화구를 던진다면, 타자는 당할 가능성이 크다. 이럴 경우 쿠세를 의식하지 않는 타자가 오히려 안타를 칠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쿠세는 어디까지나 확률 싸움이다.
[프로야구 경기장면. 사진 = 마이데일리 사진 DB]
김진성 기자 kkomag@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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