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김민성의 스타★필(feel)]
미남미녀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요즘 배우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희소성이다. 최근에 단연 특이하고 돋보이는 여배우를 발견했는데, 관객 300만 명을 넘긴 영화 ‘역린’(감독 이재규)에서 궁녀 월혜 역을 맡은 정은채가 바로 그녀다.
뽀얀 얼굴과 맑은 눈동자, 동양적이면서도 서구적인 마스크는 20년 전 심은하를 처음 발탁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신선하면서 신비로운 느낌이 꼭 닮은꼴이다. 은퇴 후 화가로 전향한 심은하처럼 정은채도 연기뿐 아니라 다양한 재능을 겸비했다. 패션 명문 세인트 마틴을 휴학 중인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딴 미니 음반 ‘정은채’를 발표했을 만큼 노래도 곧잘 부른다. 직접 가사를 쓰고 멜로디도 만들만큼 감성이 풍부하다.
'역린'에서의 연기 또한 신선하면서 풍부했다. 궁궐 의복을 손질하는 세답방의 나인답게 단정한 품새지만, 말 못할 비밀과 무게감을 지닌 신비로운 존재다. 왕의 생존을 가르는 키맨에 썩 잘 어울린다. 흥행 주역 현빈과 조재현, 정재영, 조정석, 김성령 등 쟁쟁한 배우들 사이에서도 전혀 기죽지 않는 존재감을 드러냈다. 워낙 많은 인물이 등장하고, 각자의 사연들이 얽히고설킨 가운데 적은 출연 분량임에도 확실히 배역도 배우도 기억에 남는다. 가공의 인물이지만, 확실한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배우가 되기 위해 8년 영국 유학을 중단하고, 홀연히 한국으로 날아온 정은채를 제일 먼저 알아본 것은 문제적 감독 홍상수였다. 홍상수 감독이 선호하는 여배우는 ‘깨끗하고 굵은 느낌’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는데, 정은채가 그 느낌에 꼭 들어맞는다. 맑고 깊은 감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어딘지 자기 주관이 뚜렷할 것 같은 당당함이 엿보인다. 홍상수 감독의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에서 해원역으로 캐스팅된 그녀는 매일 아침 받는 쪽대본을 완벽하게 소화했다. 홍상수 특유의 어색한 대화들과 지질한 남자들 사이에 있는 주인공 해원의 복잡한 마음을 신인답지 않은 대범함으로 표현했다.
이후 이재용 감독의 실험적 작품인 ‘뒷담화’에서도 호연을 펼치며 국제영화제에 초청되기도 했다. 비록 영화를 통해 불특정 다수에게 대중적인 인지도는 얻지 못했지만, 엇비슷한 얼굴과 판에 박힌 연기가 아닌 특별한 존재감으로 충무로 블루칩으로 부상한 것이다.
사실 정은채는 정식 연기공부를 한 배우는 아니다. 귀국 직후 일면식도 없는 최형인 교수를 찾아가 진로 상담을 받기도 한 그녀는 영화 ‘초능력자’에 캐스팅되기 전까지 직접 대학을 찾아다니며 영화학도들이 찍는 단편영화에 참여하며 현장에서 연기를 배웠다. 이후 각종 영화 오디션을 홀로 찾아다니며 배역을 따냈고, 이온음료 CF 모델로 발탁되면서 대중에게 얼굴을 익혔다. 그리고 이제 ‘역린’을 통해 확실히 떴다. 영화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그녀의 연기에 대한 호평이 이어지고 있다.
사극 영화 사상 최고의 미장센을 지녔다는 ‘역린’은 드라마 ‘다모’, ‘베토벤 바이러스’, ‘더킹투하츠’ 등을 연출한 이재규 감독의 스크린 데뷔작이다. 이재규 감독은 정은채의 연기에 대해 “비록 처지는 비천하지만, 속을 알 수 없는 깊은 눈을 지녔고, 사건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내내 당당함을 잃지 않는 캐릭터를 제대로 그려냈다”고 호평했다.
배우와 무속인은 묘한 공통점이 있다. 일반인들에게 없는 특유의 아우라가 있으며,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끼 혹은 기(氣)가 넘쳐 배우를 하다가 신내림을 받아 무속인으로 전향한 사례도 있다. 특별하고 독특한 아우라로 배우의 기(氣)가 충만한 정은채. 영화 ‘역린’을 통해 신비와 신선을 오가는 묘한 매력을 풍긴 그녀가 더욱 발전하기를 기대해본다.
[배우 정은채. 사진 = 영화 '역린' 포스터, 스틸컷]
이승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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