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마이데일리 = 포항 김진성 기자] “자존심 상했다.”
삼성 이승엽은 “자존심이 상했다”라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 울분을 털어낸 5회 2사 1,3루 상황에서의 역전 결승 스리런 홈런. 21일 포항 롯데전의 하이라이트였다. 사실 구경하기 쉽지 않은 진귀한 장면이었다. 이승엽 앞 타순에서 고의사구가 발생한 장면, 그리고 그 작전을 뒤엎은 결승 스리런 홈런 장면 모두 그랬다. 분명 시대는 달라졌다. 이승엽은 더 이상 예전 같지 않다. 하지만, 이승엽은 이승엽인 것도 사실이다.
▲ 고의사구, 대기타석 타자의 심정은
고의사구. 야구의 수많은 작전 중 하나다. 2루 혹은 3루 등 스코어링 포지션에 주자가 있지만, 1루가 비어있는 상황에서 수비 측이 취할 수 있는 작전. 수비를 하는 입장에선 1루에 주자를 채우면 자연스럽게 포스 아웃에 의한 더블플레이 찬스가 생긴다. 아웃카운트를 쉽게 늘릴 수도 있지만, 루상의 주자가 늘어나기 때문에 대량실점 가능성도 커진다. 한 마디로 양날의 검.
그럼에도 고의사구 작전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건 그 타자의 다음 타석에 들어서는 타자 때문이다. 대량 실점 부담 속에서도 고의사구를 하는 건 그 다음 타자가 상대적으로 약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타자들로선 자신의 앞 타순에서 고의사구가 나오면 기분이 썩 유쾌하진 않다. 그만큼 자신을 과소평가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예전 한 수도권 구단 타자는 “대기타석에서 이를 갈고 타석으로 걸어갔다”라고 말했다. 타자의 그런 심정이 간혹 각성을 불러일으켜 타석에서의 집중력을 높이기도 한다.
▲ 롯데의 엄청난 승부수
이승엽은 “한국에 돌아온 뒤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고 했다. 한국에 돌아온 뒤가 아니라 어떤 팀이 천하의 이승엽 앞에서 고의사구 작전을 펼칠 수 있었을까. 더구나 이승엽은 이날 직전 타석서 장원준에게 홈런을 때렸다. 그럼에도 롯데가 이승엽 앞 타자인 박석민을 고의사구로 내보낸 건 엄청난 승부수였다.
물론 롯데로서도 이유는 있었다. 고의사구로 거른 박석민은 최근 타격감이 굉장히 좋았다. 이승엽은 전 타석서 홈런을 쳤지만, 기본적으로 좌완 장원준은 좌타자에겐 자신감이 있다. 올 시즌 장원준은 국내 최고 좌완 에이스. 롯데로선 장원준이 비록 이승엽에게 홈런을 맞았으나 장원준에 대한 믿음이 두텁다. 그렇지 않고선 그런 승부를 걸 수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이승엽은 롯데의 승부수를 무력화시켰다. 장원준의 커브를 제대로 공략했다. 2003년 6월22일 대구 SK전 이후 무려 3986일만에 개인통산 20번째 연타석 홈런을 터트렸다. 이후 두 팀의 희비는 엇갈렸다. 이 장면은 승부처였다. 이승엽은 “자존심이 상했다. 안타든, 홈런이든 꼭 치고 싶었다”라고 했다.
▲ 타격준비동작 1~10 중 1~3이 빠졌다
이승엽은 타구를 담장 밖으로 훌쩍 넘겼던 전성기 극강의 기량이 아니다. 홈런이 될 법한 타구가 워닝트랙에서 잡히는 경우가 많다. 더구나 이승엽은 지난해 최악의 슬럼프를 겪었다. 류중일 감독은 올 시즌 이승엽을 6번타순에 고정 배치했다. 이승엽이 처한 냉정한 현실을 반영한 것이었다. 한편으로 3~5번 중심타선 못지 않게 클러치 능력이 중요한 폭탄타순에 넣으며 믿음을 드러낸 것이기도 했다.
이승엽은 “타격 감이 좋다. 포항에서 공이 유독 잘 보인다”라고 했다. 실제 이승엽은 포항에서만 37타수 16안타 타율 0.432 4홈런 14타점을 기록했다. 하지만, 3986일만의 연타석 홈런을 단순히 포항에서 강했다는 이유만으로 설명할 순 없다. 이승엽은 “배트를 눕혔더니 효과가 있다”라고 했다. 22일 현재 올 시즌 타율 0.310 6홈런 25타점. 이승엽은 부활했다.
배트를 눕힌 채 타격에 임하는 건 큰 의미가 있다. 지난해 이승엽은 타격 준비 자세에서 배트를 꼿꼿이 세웠다. 올해는 비스듬하게 눕혔다. 그만큼 배트가 공을 향해 나오는 시간을 줄이는 효과가 생겼다. 빠른 공은 빠른 공대로, 변화구는 변화구대로 공략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가 생겼다. 이승엽은 “타격 준비동작이 1에서 10이라면 1에서 3을 없앤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승엽은 “지금 나에겐 6번타순이 어울린다. 편하다”라고 했다. 그 이유에 대해선 “중심타선에 들어서지 않으니 못 쳐도 부담이 없다. 3번 타자 때보다는 여유가 생겼다”라고 했다. 심리적인 부담을 덜면서 공이 잘 보이기 시작한 것. 류중일 감독은 그런 이승엽을 두고 “안타만 치면 된다”라며 부담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이승엽은 “지금보다 더 잘할 수 있다”라고 자신을 채찍질한다.
이승엽 앞에서 벌어진 고의사구. 아무리 기량과 파워가 예전 같지 않다고 해도 이승엽으로선 굴욕이었다. 하지만, 이승엽은 연타석 홈런으로 처절하게 응징했다. 그리고 삼성의 역전승을 이끌었다. 전성기 3번타자 못지 않은 6번타자의 남다른 위압감. 역시 이승엽은 이승엽이다.
[이승엽. 사진 = 마이데일리 사진 DB]
김진성 기자 kkomag@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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