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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리티 프로그램의 불필요한 연출'
[마이데일리 = 이승록 기자]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골자는 결국 '훔쳐보기'다. 연예인들은 집에선 어떤 차림인지, 옷장에는 옷이 얼마나 많은지, 화장품은 뭘 쓰는지, 친구들이랑 만나 무슨 얘기를 하는지, 하물며 밥 먹을 땐 어떤 반찬이랑 먹는지, 연예인의 평소 생활에 대한 호기심이다. 스타의 화려한 일상에 위화감이 드는 한편 완벽함으로 정성스럽게 포장돼 있던 스타가 나와 비슷한 잠옷을 입고 꾀죄죄한 몰골로 내가 어제 끓여 먹었던 것과 맛이 별반 다르지 않을 듯한 라면스프 넣은 김치찌개를 먹으면 친근감과 더불어 '아, 쟤도 사람이구나' 하고 공연한 안도감마저 드는 것. 그게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다.
최근 종영한 케이블채널 온스타일 '제시카&크리스탈' 제작진이 보란 듯이 제시카, 크리스탈 두 사람의 이름만으로 프로그램을 작명했단 건 그만큼 자신이 있단 뜻이었다. 다른 것보다 '우리 리얼리티 프로그램에는 제시카와 크리스탈이 함께 나와요'라고 위시하는 거랄까. 인기 걸그룹 소녀시대와 f(x)의 멤버니까. 그 자신감의 이유는 어느 정도 설명됐다. 두 멤버가 10대 소녀들의 워너비인 데다가 패셔니스타란 사실도 거들었다. 그리고 그 둘이 친자매란 사실만큼은 다른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베낄 수조차 없는 희소가치였다.
제작진은 자매의 일상을 보여주는 데 충실하고자 애썼다. '정자매'는 미국으로 화보 촬영을 떠나 옛 친구들과 재회해 추억을 수다 떨었고, 카페 테라스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보며 남자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결혼'이란 미지의 미래를 아득하게 꿈꿨고, 소녀시대와 f(x) 멤버들을 초대해 장난쳤으며, 팬들도 몇 명 불러 간식을 나눠 먹으며 거리를 좁혔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라면 으레 한다는 단골 코스 '민낯 공개'도 빼놓지 않았다.
그러나 제작진의 자신감이 과했을까. 만족할 만한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리얼'인데 애당초 배경이 '연출' 된 공간이었다. '제크하우스'라고 불린 두 사람의 집은 사실 촬영용 스튜디오라고 불리는 게 더 어울렸다. 곳곳에 함정처럼 시청자들이 빠지길 기다리던 PPL은 자연스러운 일상에 대한 기대감을 배반했다. 내레이션은 시쳇말로 '오글거렸고', 자막은 시청자들이 느낄 감정보다 한 발 앞서 공감을 강요하는 듯했다.
방영 당시 몇몇 논란이 있긴 했어도 2008년 케이블채널 엠넷 '오프 더 레코드, 효리'에서 인상적이었던 것 중 하나가 이효리가 햄버거를 먹던 장면이다. 햄버거랑 콜라를 먹던 이효리는 앞에 앉은 스타일리스트에게 이렇게 물었다.
"다른 연예인들 하고 촬영 가면 이런 거(햄버거나 콜라, 감자튀김) 막 먹냐?"
"(김)태희네가 제일 많이 먹어"
"태희는 촬영하든지 말든지 많이 먹어? 원래 날씬하잖아?"
"원래 미식가라서 먹는 거 되게 좋아한대"
"많이 먹어도 살은 잘 안 찌나 보다. 전지현은 몸에 좋은 것만 먹어? 이런 거 안 먹어?"
"별로 안 좋아해."
"다들 노하우가 있었어. 나만 맨날 술 먹고 콜라 먹고 안 좋은 것만 먹었던 거야. 너 왜 나 안 말렸니!"
이효리는 햄버거랑 콜라를 스타일리스트 쪽으로 밀었다. 하지만 금세 "왜 이렇게 목이 막히냐?" "자꾸만 당기네" 하고 중얼거리곤 은근슬쩍 다시 햄버거를 크게 한 입 베어먹고 씩 웃었다. 인위적인 연출이 없을 때 드러날 수 있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매력이란 이런 것이다.
'제시카&크리스탈'에도 분명 의미 있는 장면들은 있었다. 연출이 깊게 개입한 프로그램이었음에도, 연출의 손이 미처 접근하지 못했던 장면들 말이다.
그 중 하나가 마지막회에서 제시카를 위해 크리스탈이 준비한 이벤트였다. 동생 크리스탈이 언니를 놀라게 해주겠다며 호텔 방 창문 가득 그동안 찍은 사진들을 붙여놓았고, 제시카는 뒤늦게 이를 발견하고 울컥 눈물 쏟았다. 사진도 사진이겠으나 아마 크리스탈이 덧붙여 놓은 작은 편지들 때문일 것이다. 거기에는 언니를 향한 동생의 진심 어린 마음이 삐뚤빼뚤한 글씨로 빼곡히 적혀 있었다.
'항상 내 편이라서 너무너무 든든해. 나도 언니 편이야. 늘 고마워. 그리고 그만 울자'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통해 사람들은 스타의 일상에서 의외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드라마 속이나 음악방송에선 본 적 없던 얼굴. 그게 '소박한 슬리퍼 차림'이나 '폭풍 먹방'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제시카&크리스탈' 안에서 찾아낸 건 아마도 자막으로 친절하게 강조해준 '굴욕 없는 민낯'이 아니라 침대에 걸터앉아 서로를 부둥켜 안고 "미안해. 미안해" 하던 눈물 범벅인 '정자매'의 얼굴 아닐까.
[사진 = 온스타일 방송 화면 캡처]
이승록 기자 roku@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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