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마이데일리 = 포항 김진성 기자] "400호 홈런을 맞더라도 야구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것이다."
롯데 이종운 감독은 상남자이자 쿨가이다. 지난해 각종 악재로 분열됐던 위기의 롯데를 하나로 묶었다는 호평을 받고 있다. 이 감독의 야구는 화끈하다. 도망가는 법 없이 힘 대 힘 승부를 즐긴다. 작전보다는 선수들에게 맡기는 야구를 즐긴다. 마운드 사정이 예상보다 좋지 않지만, 앓는 소리를 하지 않고 묵묵히 인내한다. 틈만 나면 선수들을 치켜세운다.
그런 이 감독이 2일 포항 삼성전을 앞두고 다시 한번 쿨한 면모를 드러냈다. 요지는 이승엽에게 400홈런을 맞는 걸 수모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 이 감독은 "야구는 기록의 경기다. 아무런 기록을 남기지 않고 은퇴하는 것보다는 홈런을 맞더라도 이름을 남기고 떠나는 게 낫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상승부, 평상시처럼 하라
지난달 31일 잠실 삼성-LG전. 승부가 사실상 결정된 경기 막판 LG 배터리가 이승엽과의 승부를 피하는 듯한 인상을 줬다. LG는 고의사구가 아니었다고 해명했지만, 팬들은 아쉬움과 비난의 목소리를 냈다. 대다수 팬은 이승엽의 400홈런 대기록을 보고 싶은데 상대가 정정당당하게 승부하지 않았다는 생각.
이런 상황서 이 감독의 소신은 눈에 띄었다. 그는 "만약 우리 투수가 대기록의 희생양이 되기 싫어서 피한다면 그렇게 하지 못하게 막을 것"이라고 했다. 정황상 이승엽의 KBO 최초 400홈런은 두 팀의 3~4일 포항 맞대결서 나올 가능성이 있다. 이승엽은 2일 경기서도 3안타 3타점 3득점을 기록하는 등 포항에서 강한 모습을 여지 없이 드러냈다. 결국 롯데 투수들 중 누군가가 이승엽 대기록의 희생양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감독은 희생양이 돼도 문제 없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는 "대기록을 허용하는 투수도 그 자체로 야구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것이다. 일부러 홈런을 맞은 것도 아니고 정상적으로 싸움을 하다가 맞는다면 뭐가 문제인가"라고 했다. 이어 "물론 그 순간엔 불명예로 남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도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했다.
▲야구는 이정민처럼
롯데 베테랑 투수 이정민은 12년 전 이승엽에게 56호 홈런을 내준 주인공. 당시 2년차 신예였고, 유명하지도 않았지만, 이승엽에게 56호 홈런을 맞고 오히려 인지도가 높아졌다. 이후 이정민은 굴곡은 있었지만, 꾸준히 롯데 불펜을 지켜왔다. 지금은 베테랑이 된 이정민에게 12년 전 왜 이승엽에게 56호 홈런을 맞았냐며 비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는 그 누구보다 지난 12년간 롯데에서 헌신했다. 이 감독에 따르면, 그런 이정민이 소리 소문없이 사라지는 투수보다 훨씬 더 낫다는 것. 그는 "프로야구 선수 100명 중 90명 정도는 아무런 기록도 없이 사라진다. 그보다는 이승엽에게 400홈런을 맞고 이름을 알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라고 했다.
조금 다른 경우지만, 메이저리그서 124승을 챙긴 박찬호도 LA 다저스 시절 대기록의 희생양이 된 적이 있다. 1999년 4월24일 세인트루이스전서 3회 페르난도 타티스에게 한 이닝 연타석 만루홈런을 맞았다. 그 유명한 '한만두' 사건. 하지만, 당시 박찬호의 위상에 금이 가지는 않았다. 이후 2001년까지 LA 다저스 주축 선발투수로 뛰었다. 심지어 2001년 10월 6일 샌프란시스코전서는 베리 본즈에게 71~72호 홈런을 내줘 다시 한번 화제가 됐다. 그래도 박찬호는 2001시즌 직후 5년 6500만달러짜리 FA 대박 계약(그 당시 기준)을 맺는 것에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투수도 타자도 언제든 서로 대기록의 희생양이 될 수 있다. "그 순간만 지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이름을 남기는 게 의미 있고, 역사가 된다"라는 이 감독의 말은 의미가 있다. 이 감독도 "이정민을 상황에 따라서 또 다시 이승엽 타석에 내세울 수 있다. 그러나 이승엽을 보고 투입을 결정하는 건 아니다"라고 했다. 실제 이 감독은 2일 경기서 이정민을 내세웠다. (물론 직접적으로 맞붙지는 않았다.)
인식을 달리 할 필요도 있다. 이승엽에게 400홈런을 내준다고 해서 그 자체로 그 투수의 야구인생이 망가지는 건 아니다. 반대로 이승엽도 어떤 투수의 퍼펙트피칭 혹은 노히트노런을 장식하는 마지막 타자가 될 수도 있다. 그 모든 건 야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종운 감독(위), 이정민(아래). 사진 = 포항 송일섭 기자 andlyu@mydaily.co.kr, 마이데일리 사진 DB]
김진성 기자 kkomag@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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