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마이데일리 = 곽명동 기자]경이로운 상상력이란 이런 작품을 두고 하는 말이겠죠. 감정을 의인화해서 하나의 세계를 구축한 뒤에 그 내면의 갈등을 현실 속 인물에 투영해내는 발상은 ‘역시 픽사구나’라는 감탄을 절로 터뜨리게 합니다.
기쁨, 슬픔, 버럭, 소심, 까칠의 다섯 감정들은 저마다 고유한 색깔이 있습니다. 기쁨은 노란색, 슬픔은 파란색, 버럭은 빨간색, 소심은 보라색, 까칠은 연두색이죠.
다른 감정들은 단일톤의 색깔을 갖고 있지만, 기쁨의 머리색깔은 파란색입니다. 이건 기쁨에도 약간의 슬픔이 담겨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기쁨이 슬픔의 감정을 느껴야한다는 뜻이기도 할 겁니다.
모든 색은 양면성이 있습니다. 같은 색이라도 밝기의 정도에 따라 느낌이 확 달라지니까요. 특히 파란색이 그렇죠. 낭만과 청렴의 상징이기도 하면서도 슬픔과 우울을 나타내는 색이기도 합니다.
로마인들은 파란색을 어둡고 미개하고 세련되지 못한 색이라고 간주했습니다. 파란색에 대한 부정적 시각은 꽤 오랜 역사를 유지해왔죠. 12세기에 이르러 파란색이 교회에 입성하면서 우아하고 귀족적이고 신성한 색으로 받아들였지만, 어두운 본성을 말끔히 지워내진 못했습니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1774)에서 베르테르가 로테를 처음 만났을 때 입었던 옷도 파란색 연미복이었죠. 괴테는 파란색을 낭만의 상징으로 해석했지만, 베르테르의 비극적 죽음과 맞물리면서 전 유럽에 우울의 색깔이라는 인식이 퍼져나갔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의 ‘슬픔에 잠긴 노인’(1890)에서도 노인은 온통 파란색의 옷을 입고 있습니다.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삼색 연작 가운데 ‘블루’(1993)는 교통사고로 남편과 딸을 잃은 줄리(줄리엣 비노슈)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혼자 살아남았다는 죄의식에 고통스러워하던 어느날, 줄리는 남편에게 정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되죠. 이 영화에서 파란색은 상실과 재생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압델라티프 케시시 감독의 2013년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가장 따뜻한 색, 블루’의 파란색은 어떨까요. 여고생 아델(아델 에그자르코풀로스)은 미대생 엠마(레아 세이두)를 보고 첫 눈에 반합니다. 엠마의 머리색깔은 파란색이었죠. 엠마가 자신의 품으로 들어올 때 파란색은 따뜻했을 겁니다. 그러나 엠마가 떠날 때 파란색의 온기는 식었죠. 마지막 장면에서 아델은 엠마의 전시회를 찾아갑니다. 엠마의 그림은 푸른 톤에서 붉은 계열로 바뀌었습니다. 머리 색깔도 달라졌고요. 파란색 원피스를 입고 간 아델은 뒤돌아 걸어갑니다. 사랑의 기쁨이 이별의 슬픔으로 바뀌는 순간이지만, 아델의 발걸음은 힘차 보입니다. 이별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또박또박 걸어가는 아델의 모습은 당당해 보였습니다. 슬픔을 받아들이고, 그 힘으로 인생의 다음 단계로 넘어갔으니까요.
우리는 사랑의 기쁨에만 취해 살 수 없습니다. 이별의 슬픔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파란색의 온기 못지않게 냉기도 감내해야죠. 생로병사가 모두 슬픔의 감정 아니던가요. ‘인사이드 아웃’의 기쁨이 슬픔의 파란색을 공유한 것도 마찬가지 이유일 겁니다. 때론 슬픔도 힘이 됩니다.
곽명동 기자 entheos@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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