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마이데일리 = 강산 기자] "아직 포수가 가장 좋아요."
한화 이글스 외국인 타자 제이크 폭스가 처음 팀에 합류했을 때 했던 말이다. 메이저리그 시절 포수는 물론 1루수와 3루수, 좌익수와 우익수를 모두 경험했다. 투수와 중견수, 2루수와 유격수를 제외한 전 포지션을 소화하며 스스로 활용도를 높인 것. 전날(26일) 대전 삼성 라이온즈전은 폭스가 유틸리티맨으로서 매력을 마음껏 발산한 한판이었다.
포수 마스크를 쓰고 경기에 나선 점이 눈에 띈다. 전날 대타 출전한 폭스는 우익수 수비에 들어갔고, 6회초부터 마스크를 쓰고 신인 투수 김민우와 호흡을 맞췄다. 한화는 1회초 선발투수 안영명이 교체될 때 선발 포수 조인성을 정범모로 교체했는데, 5회말 정범모 타석에 대타 정현석이 들어서면서 폭스가 데뷔 후 처음 포수 마스크를 쓴 것. 2004년 엔젤 페냐(당시 한화), 지난해 비니 로티노(당시 넥센 히어로즈) 이후 포수로 나선 3번째 외국인 선수로 등극한 순간.
기록부터 살펴보자. 6회부터 11회까지 김민우, 권혁과 호흡을 맞췄는데, 실점을 단 한 점으로 막았다. 6회부터 8회까지는 무려 삼진 6개를 유도하며 한 명의 타자도 출루시키지 않았다. 9-8로 앞선 9회말 동점을 허용했으나 역전은 막아냈고, 10회와 11회에는 권혁의 1피안타 2볼넷 무실점 호투를 이끌어냈다. 특히 11회초 볼넷으로 출루한 삼성 박한이의 도루를 잡아내기도 했다. "어깨는 좋더라"는 김 감독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사실 폭스는 준비된 포수였다. 6일 전으로 시계를 돌려보자. 21일 대전 kt wiz전을 앞두고 한화 선수단은 훈련에 여념이 없었다. 당시 포수 장비를 착용한 폭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실전은 아니었지만 직접 사인을 내며 수비 위치를 조정했고, 몇 차례 2루 송구 연습도 했다. 후루쿠보 겐지 배터리코치의 조언을 들을 때 자세는 사뭇 진지했다. 당시 김성근 한화 감독은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 포수 훈련을 시켰다. 어깨는 좋더라"고 말했다. 그런데 만일의 상황이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폭스는 메이저리그 32경기, 마이너리그 2경기에서 포수 마스크를 썼다. 최근 2년간 포수 경험이 있어 유사시에 마스크를 쓸 만했다. 본인도 "포지션에 관계없이 내 몫을 할 것이다"면서도 "가장 좋아하는 포지션은 포수다. 투수를 이끌고, 야수들의 수비 위치를 조정해주면서 경기를 풀어가는 게 좋다"고 말했다. 그리고 한 번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방망이도 불을 뿜었다. 2회와 4회 안타를 터트렸고, 8-8로 맞선 7회말 좌중월 솔로 홈런으로 리드를 안겼다. 9-9로 맞선 9회말 선두타자로 나서 2루타를 터트렸다. 득점과 이어지진 않았지만 상대 간담을 서늘케 하기 충분했다. 10회말 2사 1, 3루 상황에서는 우익수 뜬공으로 물러났지만 타구 질은 좋았다. 우측 담장 바로 앞에서 잡혔다. 6타수 4안타 1타점 1득점 맹활약. 포수 마스크를 쓴 뒤에는 더욱 순도 높은 타격을 자랑했다. 예상치 못한 공수 맹활약. '어메이징'이라는 단어가 딱 맞았다.
사실 폭스는 계륵과 같은 존재였다. 나이저 모건의 대체 외국인 타자로 한화 유니폼을 입었는데, 4경기만 뛰고 부상에 발목 잡혔다. 5월 23일 kt전 도중 교체된 뒤 8월 16일 포항 삼성전에 대타로 출전할 때까지 무려 86일이 걸렸다. 예상 재활 기간인 4주를 훨씬 넘겨 돌아왔다. "폭스 교체는 없다"며 믿음을 보여준 김 감독에게 응답해야 한다는 부담 때문이었는지, 복귀 후 첫 3경기에서는 6타수 1안타로 부진했다.
하지만 20일 kt전에서 데뷔 첫 홈런을 터트리며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고, 전날 4안타 맹타에 포수 마스크까지 쓰고 승리를 도왔다. 한화의 연장 접전 끝 10-9 승리는 폭스의 활약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김 감독은 "폭스를 테스트했는데, 상상외로 잘해줬다. 기용 폭이 넓어질 것 같다"고 칭찬했다.
폭스와 호흡을 맞춰 5이닝 2피안타 6탈삼진 2볼넷 1실점 호투한 김민우는 "폭스의 사인대로 던졌다. 폭스가 덩치가 크다 보니 스트라이크 존도 커 보였고, 편안하게 리드해줬다"고 말했다. 폭스는 "기회를 주신 감독님께 감사드린다. 경기 전에 포수로 나갈 수 있냐고 물어보셔서 팀 승리에 도움이 된다면 언제든 나갈 준비가 돼 있다고 얘기했다. 어떤 포지션이든 열심히 해서 팀 승리에 공헌한 점이 가장 기쁘다"고 말했다.
6일 전이 떠올랐다. 당시 포수 훈련을 마친 폭스를 붙잡고 물었다. '당장 포수로 실전에 나설 수 있겠느냐'고. 그는 "포수 훈련은 마치 자전거를 타는 듯 편안했다"며 "포지션에 신경 쓰지 않는다. 감독님께 어떤 포지션이든 뛸 수 있다고 말씀드렸다"고 답했다. 그는 올해 벌써 좌익수와 우익수, 포수까지 3개 포지션을 오갔다. 공교롭게도 너무나 중요한 경기에서, 야전사령관인 포수로 승리를 이끌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이미 준비된 포수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한화 이글스 제이크 폭스. 사진 = 한화 이글스 구단 제공]
강산 기자 posterboy@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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