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축구
[마이데일리 = 안경남 기자] 2015-16시즌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가 레스터시티의 우승으로 대장정의 막을 내렸다. 전술적으로 충격적인 시즌이었다. #4-4-2가 챔피언이 됐고 #점유율은 힘을 잃었다. 이래서 축구가 어렵다. 끊임없이 진화한다. 압박 축구의 창시자인 빅토르 마슬로프(Viktor Maslov)는 “축구는 항공기와 같다. 속도가 증가하면 공기저항도 증가한다. 그러니 앞부분을 더욱 유선형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레스터의 우승은 축구 전술에 완벽한 답이 없음을 또 한 번 증명한 것이 아닐까.
#4-4-2
축구종가 영국에서조차 4-4-2는 점차 설 자리를 잃어왔다. 오프사이드 룰이 개정되면서 수비수보다 공격수가 유리해졌고 그로인해 무작정 수비라인을 올릴 수 없게 된 4-4-2는 4열 포메이션인 4-2-3-1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영국 축구전술가 조나단 윌슨(Jonathan Wilson)조차 2010년 남아공월드컵에서 잉글랜드가 독일에 1-4로 대패하자 4-4-2의 시대는 끝났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클라우디오 라니에리 감독은 4-4-2로 챔피언이 됐다. 1990년대말 알렉스 퍼거슨 감독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이후 4-4-2가 EPL을 제패한 건 실로 오랜만이다. 레스터시티 우승이 놀라운 이유다. 라니에리는 4-4-2의 약점을 최소화했다. 수비 뒷공간을 메우기 위해 라인을 내렸고, 멀어진 상대 골문까지의 거리는 빠르고 개인기술에 능한 공격수로 대체했다. 말처럼 쉬운 건 아니다. 전술에 맞는 선수와 반복적인 연습이 필요하다.
#점유율
바르셀로나가 유럽을 지배한 이후 점유율(Possession) 축구는 대세가 됐다. 하지만 레스터는 2006-07시즌 이후 가장 낮은 점유율(약46%)로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라니에리 감독은 “우리 팀은 볼 점유에 익숙하지 않다. 어설프게 볼을 점유하다간 실점으로 직결된다. 굳이 그런 위험을 무릅쓰며 점유율 축구를 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즉, 라니에리 감독은 ‘전술’에 ‘선수’를 맞추지 않고 ‘선수’에 ‘전술’을 맞췄다. 물론 이것이 정답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레스터가 자신들에게 맞는 방법을 찾았을 뿐이다.
점유율을 포기하는 동시에 레스터는 상대의 실수를 노렸다. 주제 무리뉴 감독은 “공을 오래 소유할수록 실수할 확률이 높다. 상대 실수를 유발하는 게 더 효과적이다”며 실수의 스포츠인 축구에서 소유는 오히려 독이 된다고 주장했다. 라니에리의 레스터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 함께 이것을 가장 잘 실현한 팀이었다. 그들은 상대 실수를 곧바로 역습의 시발점으로 활용했다. 점유율을 내려놓고 실리를 챙겼다.
#박스투박스포워드
레스터가 전체적인 라인을 내리고도 상대진영까지 전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스피드’와 ‘활동량’을 갖춘 제이미 바디와 오카자키 신지 덕분이었다. 특히 바디는 역습 상황에서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그는 레스터 페널티박스부터 상대 페널티박스까지 치고 달렸다. 한준희 KBS해설위원은 그런 바디를 ‘박스투박스 포워드(Boxtobox Forward)’라고 불렀다. 단순히 빨랐기 때문에 가능한 액션은 아니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레스터를 상대한 팀들은 대부분 높은 점유율을 가져갔다. 때문에 라인을 올렸을 때 카운터어택에 취약했다. 바디가 뛸 수 있는 공간이 많았다는 얘기다. 리버풀전 ‘62야드(약56m)’ 원더골이 대표적이다.
#메수트외질
EPL은 플레이메이커의 무덤으로 불렸다. 지네딘 지단(현역시절 유벤투스,레알마드리드), 파블로 아이마르(발렌시아), 후안 로만 리켈메(비야레알), 후이 코스타(AC밀란), 안드레아 피를로(AC밀란,유벤투스) 등 2000년대 축구 팬들이 기억하는 유명한 플레이메이커는 대부분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 꽃을 피웠다. 이탈리아 무대를 평정했던 후안 세바스티안 베론(라치오)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첼시에서 기대 만큼 빛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메수트 외질은 여전히 EPL에서 우아한 플레이메이커가 통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올 시즌 외질은 19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도움왕에 등극했다. 비록 2002-03시즌 티에리 앙리가 세웠던 한 시즌 최다 어시스트(20개)에는 아쉽게 1개가 부족했지만, 그의 화려한 도움 덕분에 아스날은 11년 만에 2위로 시즌을 마칠 수 있었다. 플레이메이커는 살아있다.
#라볼피아나
3위로 아쉽게 시즌을 마쳤지만 토트넘 홋스퍼의 경기력은 분명 인상적이었다. 마우리시오 포체티노 감독의 전술적인 특징은 라볼피아나로 불리는 변형 스리백(back three:3인수비)이었다. 정확한 명칭은 살리다 라볼피아나(La Salida Lavolpiana)다. 쉽게 말하면 포백(back four:4인수비) 앞에 위치한 수비형 미드필더가 순간적으로 센터백 사이로 내려오는 움직임을 말한다. 한국에선 신태용 올림픽대표팀 감독이 자주 사용한 전술이기도 하다.
라볼피아나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리카르도 라 볼페 감독이 고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동향의 포체티노가 영향을 받은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현대축구에서 가장 압박이 심한 곳은 바로 미드필더 지역이다. 수비형 미드필더도 예외가 아니다. 빌드업 과정에서 수비형 미드필더에 대한 압박이 거세지자 라 볼페 감독은 수비형 미드필더를 센터백 사이로 내려 자유를 줬다. 단순히 압박을 벗어나기 위한 조치는 아니었다. 수비형 미드필더가 내려와 순간적으로 스리백이 되면서 좌우 풀백은 마치 윙어처럼 높은 위치까지 전진했다. 한 명을 내리면서 두 명이 전진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반대발윙어
주발과 반대되는 위치에 선 윙어는 더 이상 낯선 전술이 아니다. 반대발윙어(Inverted Wingers)는 리오넬 메시, 아르옌 로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등에 의해 널리 알려졌다. 이들의 공통점은 사이드에서 중앙으로 파고들며 직접 슈팅을 시도한다는 것이다. 과거 투톱이 유행하던 시기에는 측면 미드필더가 사이드를 질주한 뒤 크로스를 올리는 것이 정석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투톱이 원톱으로 바뀌면서 이제는 윙포워드도 골을 넣어야 하는 상황이 됐다. 레스터의 4-4-2가 과거와 다른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이 반대발윙어다. 리야드 마레즈와 마크 알브라이튼은 주발과 반대되는 위치에 섰다. 마레즈는 중앙으로 이동해 슈팅을 하거나 침투패스로 바디의 골을 도왔다. 알브라이튼은 사이드를 치고 달려가 한 번 접은 뒤 오른발로 크로스를 올렸다. 둘은 레스터에 다양한 공격 패턴을 제공했다.
비단 레스터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토트넘도 에릭 라멜라, 에릭센, 손흥민, 나세르 샤들리를 반대발윙어로 활용했다. 그리고 루이스 판 할 감독도 왼발잡이 후안 마타를 오른쪽에, 오른발잡이 앙토니 마샬을 왼쪽에 배치했다. 반대발윙어는 대세가 된지 오래다.
#대인방어
1대1 대인방어는 루이스 판 할 체제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여전히 헤매고 있는 이유 중 하나다. 네덜란드 출신의 판 할은 압박 과정에서 맨마킹을 선호한다. 지난 2014년 브라질월드컵에서도 그가 이끌었던 오렌지군단은 공을 소유하지 않았을 때 상대 미드필더를 1대1로 방어했다. 그러나 영국 스카이스포츠 해설위원인 제이미 캐러거는 이에 대해 “1대1 맨마킹을 시도하는 건 반대로 자신들의 수비지역에서도 1대1 상황이 될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이는 상당한 위험을 안고 싸우는 것이다. 90분 동안 상대 공격수와 1대1이 되는 걸 원하는 수비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판 할의 1대1 수비법은 리그 최소실점(34골)으로 이어졌다. (폭발물 해프닝으로 연기된 본머스전을 제외하고) 최소실점이 유력했던 토트넘이 최종전서 뉴캐슬에 5골을 허용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 허나, 중요한 순간 맨유의 발목을 잡은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크리스 스몰링과 달레이 블린트가 89분을 잘하고도 1분을 뚫려 비기거나 패했던 맨유다. 물론 맨마킹이 틀렸다는 건 아니다. 그러나 위험한 건 사실이다.
#다이아몬드
다이아몬드 전술은 이름만큼 아름답지 않다. 측면 미드필더가 좁게 서면서 사이드 방어에 취약하고 1명의 홀딩 미드필더에게 과부하가 걸리기 쉽다. 때문에 과거 카를로 안첼로티 감독이 이끌었던 AC밀란처럼 다이아몬드에 적합한 선수 구성(ex 젠나로 카투소, 클라렌스 세도르프, 마시모 암브로시니 등)이 되지 않은 상태에선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다이아몬드는 여전히 변칙 전술로 사랑을 받고 있다. 올 시즌 EPL에선 스완지시티와 웨스트햄이 다이아몬드 4-4-2를 사용했다. 비록 꾸준히 사용되진 않았지만 상대에 따라 기대 이상의 효과를 낸 경기도 있다. 위르겐 클롭의 리버풀도 다이아몬드를 몇 차례 꺼냈다. 다이아몬드는 다음시즌에도 심심치 않게 발견될 가능성이 높다.
#스리백
라볼피아나와 스리백은 엄밀히 말해 다르다. 홀딩 미드필더가 내려오면서 일시적으로 스리백이 되는 라볼피아나와 달리 우리가 말하는 진짜 스리백은 시작부터 3명의 센터백이 배치되는 전술이다. 올 시즌 EPL에선 전략적으로 스리백을 쓰는 팀이 생각보다 많았다. 레스터, 왓포드의 투톱 전술에 대응하기 위한 조치였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선덜랜드, 웨스트브롬위치알비온(WBA)가 투톱에 맞서 스리백을 가동했다. 이유는 숫자 때문이다. 상대 투톱이 강할 경우 2명의 센터백으로 맞서는 것보다 3명을 세우는 것이 숫자싸움에서 더 효과적이다. 투톱이 고개를 들수록 스리백도 늘어날 것이다.
#게겐프레싱
클롭이 리버풀 지휘봉을 잡으면서 EPL에도 ‘게겐프레싱(Gegen Pressing)’이란 단어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흔히 전방 압박으로 불리는 게겐프레싱은 높은 위치에서 압박을 시도해 상대 골문까지 가는 공격의 거리를 높이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4-4-2로 유럽을 지배했던 아리고 사키(Arrigo Sacchi)의 압박과 비슷한 원리다. 다만 클롭의 게겐프레싱은 3열이 아닌 4열 포메이션의 4-2-3-1(혹은 4-1-4-1)이 바탕이며, 무작정 전진해 공을 빼앗기 위한 압박보다는 상대에게 공을 빼앗겼을 때 빠르게 되찾는데 목적이 있다.
실제로 지난해 11월 맨체스터 시티 원정에서 4-1 대승을 거뒀을 때 리버풀은 압박의 강약을 매우 잘 조절했다. 당시 스카이스포츠 해설위원이었던 게리 네빌은 “리버풀이 미친듯이 압박한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그들은 전체적인 라인을 내린 뒤 달려서 공을 빼앗는 패턴으로 역습을 시도했다. 특히 센터백이 빌드업을 할 때 압박해 공을 탈취했다”고 설명했다. 클롭과 리버풀의 다음 시즌이 더 기대되는 이유다.
[사진 = AFPBBNEWS]
안경남 기자 knan0422@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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