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마이데일리 = 허설희 기자] 역사를 다루는 작품에 임할 때 배우의 자세는 확실히 달라진다. 무대 위에서 언제나 진실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시대의 아픔, 역사를 이야기할 때 느끼는 책임감은 확실히 무겁다. 뮤지컬배우 정재은 역시 뮤지컬 ‘영웅’ 무대를 통해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뮤지컬 ‘영웅’은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다룬 작품. 극중 정재은이 연기하는 설희는 명성황후의 마지막 궁녀로서 그녀의 죽음을 목격하고 일본에 복수하고자 이토에게 접근하는 비극적 인물이다.
정재은은 혼란스러운 시국에 역사를 이야기 하는 만큼 다른 반응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예상은 했는데 이렇게까지 주목 받을 줄은 몰랐다. 더 주목 받아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고 고백했다.
“사실 부담감이 아주 좋게 반영이 됐어요. 모든 장면에 있어 긴장하게 됐죠. 역사 속 사실이기 때문에 토씨 하나 안 틀리려고 조심했어요. 저 뿐만 아니라 모든 분들이 다 그랬어요. 다른 극장에서는 즐겁고 긴장 풀려고 농담도 하고 얘기도 하고 그랬는데 ‘영웅’은 달랐어요. 특히 전 가상 인물을 연기하기 때문에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었어요. 잘못 전달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더 신경 썼죠.”
실제 존재했던 여성 독립운동가의 삶을 모티프로 해 만든 가상의 인물 설희를 연기함에 있어 고민도 많았다. 실제 삶을 모티브로 했지만 새롭게 만들어진 가상 인물이기 때문에 접근하는데 있어 초반에는 어려움도 겪었다.
그는 “나 역시 처음에는 가상 인물이라는 생각에 연습하는 과정에서 아무것도 못했었다”며 “내가 표현해야 하는 인물임에도 가상 인물이라는 전제가 항상 깔려 있으니 아무것도 못하겠더라”고 털어놨다.
“아무것도 못할 때 역사 공부를 정말 많이 했어요. 역사를 다룬 뮤지컬들은 사실이 있고 특히 ‘영웅’은 우리나라의 아픔을 이야기 하니까 잘못 건드리면 안된다는 생각에 더 어려운 것도 있었어요. 그러면서 설희는 실제 역사의 아픔을 직접 눈으로 봤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그래서 점차 가상 인물이라는 것을 배제했어요. 실제로 존재했을 거란 생각을 속으로 많이 하게 됐죠. 실질적인 역사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가상 인물이라는 건 없어졌어요. 여성독립운동가 설희라는 인물은 우리 엄마일 수도 있고 지나가는 여자일 수 있고, 충분히 가상 인물이 아닐 수 있다고 생각해요. 존재할 만한 인물이라는 게 제 모티브였어요.”
존재할 만한 인물, 실제 삶을 표현해야 하기에 책임감은 더 커졌다. 역사의식도 생겼고, 마음가짐도 달라졌다. “이번 3.1절에도 달랐다. 옛날에는 SNS에 태극기 올리고 그랬는데 이번에는 실제로 집에 태극기를 달았다. 애국심이라면 애국심일 수 있고 내가 한국 사람이니까 해야할 일”이라고 말했다.
“서로 인정하고 서로 존중해주며 더불어 사는 지혜라는 문구가 와닿아요. 안중근 선생님이 끝까지 맺지 못한 게 동양 평화론이잖아요. 그게 지금까지도 실현이 안 되고 있고요. 그래서 안타까워요. 또 내 인간 관계에서도 그렇게 하고 있을까 고민하게 되고요. 그리고 안중근이 죽기 바로 직전에 ‘나는 지금 무얼 생각하나’라고 하는 것이 가장 와닿아요. 저 역시 그걸 보고 ‘나는 지금 무얼 생각하나’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됐어요.”
‘나는 지금 무얼 생각하나’라는 생각을 늘 하게 되면서 행동도 달라졌다. 자신의 공연이 없을 때도 매 회 공연장을 찾았다. 작품을 보는 것만으로 겸손해지고 차분해졌다. 우쭐 할 수 있는 상황에 놓인 그를 다잡을 수 있게 해줬다.
“솔직히 말하면 저는 지금 우쭐하면서 살 수 있는 시점이에요. 하지만 그 시점에 ‘나는 지금 무얼 생각하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니 그럴 수 없게 되더라고요. 이번에 안중근 역 선배들에게도 많이 배웠어요. 연습 과정부터 성실하게 임하는 모습에 감명 받았죠. 네명의 안중근이 다 달라서 배우는 게 정말 많아요.”
정재은은 1년 반 가량의 공백기 동안 많이 성장했다. 책도 많이 읽었고, 인생의 가치관을 확립하는 시간이 됐다. 자신의 한계를 느끼고 이를 채우기 위해 노력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인간 정재은을 다듬었다. 그런 시점에 뮤지컬 ‘더 언더독’, 뮤지컬 ‘영웅’을 차례로 만나게 된 것 역시 그녀를 더욱 단단한 사람으로 만드는데 도움이 됐다.
“전 다양한 작품에서 다양한 역할을 했어요. 그게 장점도 있었지만 또 다른 면에서 보면 저만의 가치관을 생각하고 추구하는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 때 ‘더 언더독’을 만나게 됐고, 곧바로 ‘영웅’을 병행하게 되면서 제 가치관을 확립하고 만족감을 느끼게 됐어요. 그런 부분을 관객들에게 드라마틱하게 전할 수도 있었고요. 그러면서 더 신중하고 간절하게,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가치관이 생겼죠. 이제 ‘영웅’ 지방 공연이 7월까지 계속 되는데 설희 역을 더 발전시키고 싶어요. 분량과 상관없이 명확하게 제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요.”
한편 뮤지컬 ‘영웅’은 오는 3월부터 지방 공연 투어에 돌입, 초연 이후 최초로 전국 16개 도시를 찾는다.
[뮤지컬배우 정재은. 사진 = 폴라리스 엔터테인먼트, 에이콤 제공]
허설희 기자 husullll@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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