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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데일리 = 강지훈 기자] 최근 들어서는 올림픽과 월드컵에 존재감이 많이 상쇄됐지만 한국이 올림픽과 월드컵에서 이렇다할 족적을 남기기 어려웠던 1980년대까지만 해도 아시안게임은 중국-일본과 정상을 다투며 수많은 명승부를 연출해 낸 대회였다. 올해로 16회째를 맞는 역대 아시안게임에서 한국이 따낸 금메달은 모두 541개.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메달이 없겠지만 그 중에서도 '백미'처럼 국민들의 추억 속에 끊임없이 회자되며 여전히 이야기되고 대회 후에도 상당한 파장과 영향력을 끼친 명승부들이 있다.
②1986년 서울아시안게임 여자육상 - 달려라, 달려라, 달려라 임춘애
이진주의 '달려라 하니'나 우라사와 나오끼의 '해피'는 만화 속 이야기만이 아니다. 임춘애의 이야기를 만화나 소설로 만들었다면 '신파'라는 비난이 쏟아졌을 것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 혼자 식당에서 밤낮으로 일하며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배경. 무허가 움막에 여섯식구가 모여살며 17살 여고생이 연탄가스 중독과 영양실조, 위장병에 시달렸다. 게다가 임춘애를 지도한 김번일 코치 역시 철저하게 육상계의 이방인. 너무 뻔한 설정이라고 욕할 만 하다. 이 모든 게 실화라는 점을 제외하면 말이다.
서울아시안게임이 개막하기 불과 4개월 전까지만 해도 임춘애는 대표 선수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 해 6월 열린 전국체전에서 1500m, 3000m, 10km 3관왕을 휩쓸자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장인 이규동씨의 지원을 얻고 대표로 전격 발탁됐다. 초등학교 때부터 그녀를 지도한 김 코치 역시 태릉선수촌에 들어왔으나 느닷없이 선수촌에 발을 들인 '무명들'을 향한 주변의 시선은 따가웠고 그들은 철저하게 외톨이였다.
주종목이 아니었던 여자 800m부터 금빛 바람이 불었다. 인도의 쿠리신칼 아브라함이 2초 빨리 결승선을 통과했으나 120m 체크 포인트를 지키지 않고 먼저 코스를 이탈하는 바람해 실격돼 임춘애에게 다소 행운이 깃든 금메달이 돌아갔다. "금메달을 주웠다"는 일각의 질투에 임춘애는 이를 더 악물고 달렸다. 주종목인 1500m 결승에서 후반까지 2-3위에 머물던 임춘애는 100m를 남기고 급작스런 스퍼트로 극적인 금메달을 목에 걸어 전국민의 스타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어 바로 다음날 3000m 결승에서도 그 앙상한 몸으로 결승선을 가장 먼저 통과한 뒤 울음을 터트리며 맨발로 트랙을 돌았다. "라면 먹으면서 운동했어요. 우유 마시고 뛰는 친구가 제일 부러웠어요"라는 외침은 온나라를 눈물 바다로 적셨다. 대회 이후 우유와 라면 신드롬이 일었고 '넘버 3' 등의 영화를 통해 패러디되기도 했다.
아시안게임과 2년 후 1988년 서울올림픽은 1980년대 한국 고도성장을 상징하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그 뒤안길에는 도시의 미관을 위해 강제로 터를 빼앗긴 철거민들이 있었고 급속한 경제 발전이라는 성과를 위해 희생된 수많은 가치들이 존재했다. 임춘애는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지강헌과 함께 1980년대 중반 이 괴리를 뼈저리게 돌아보게 만들면서 시대의 아이콘이 됐다.
[사진 = 서울아시안게임 시상식 장면]
강지훈 기자 jhoon@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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