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종합
내게도 기회가 주어졌다.
유난히도 무더웠던 여름, 스위스에서의 훈련이 그 시작이었다. 5개월 전 나는 사이클 연맹과 팀의 지원으로 세계 사이클 센터가 있는 스위스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단체 생활에 익숙했던터라 홀로 지내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역시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난 그곳 생활에 익숙해졌고, 매일 고된 훈련을 이어갔다. 그리고 어느덧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날이 다가왔다.
보름 뒤, 올 시즌 마감 경기인 전국체전이 열렸고 나를 포함한 우리 팀 모두는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좋은 성적으로 2010년을 마무리했다.
이렇게 시합을 마치면 사이클 선수 나아름이 아닌 우리 엄마, 아빠의 딸 나아름으로 돌아갈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 고작 3일 간의 휴식이었지만 정말 행복했다.
내 또래의 아이들처럼 예쁜 옷에 높은 구두를 신고 친구를 만나는 소소한 일상은 내겐 꿈일 뿐이다. 앞으로의 훈련을 위한 준비에도 벅차기 때문에 늦잠을 잔 후 엄마가 해준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만이 내 유일한 휴식이었다.
그렇게 짧은 휴식을 마치고 나는 첫 아시안게임 출전을 위해 다시 호주로 떠날 채비를 시작했다.
다른 말이 필요 없었다. 무조건 버텨야했다. 여자 선수들과는 기본 시속부터가 다른 남자들과의 훈련에 나는 호주에 도착한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지쳐버렸다. 그렇게 지친 몸을 회복시키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때문에 내 일기장엔 언제나 '할 수 있어! 힘내!' 등 스스로에게 최면을 거는 유치한 말들 뿐이었다.
하지만 꾹꾹 누르고 눌러 닫아두었던 나의 눈물샘이 결국 터져버리고 말았다. '그래, 나는 아직 어려'라는 결론이 가슴에서 머리로 내려지자마자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마냥 울었다.
'꺼억꺼억' 주변의 시선도 아랑곳 하지 않고 손바닥만한 작은 전화기 붙들고 길가에 서 펑펑 울었다. 무슨 일이냐며 넘어진거냐며 되묻는 엄마의 말엔 대답도 하지 않았다. 5분이 지났을까. 조금 진정된 나는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마음 아파하실 엄마는 생각도 않고 "집에 가고 싶어. 엄마아빠 보고싶어"라며 어리광을 부리기 시작했다.
"아름아, 울지말고 엄마 말 들어. 얼마 안 남았잖아"
한참이 지나서야 울음을 그쳤다. 엄마는 연신 어려운 가정형편에 딸자식 운동시킨 죄라며 "미안하다. 엄마가 미안하다" 이 말 뿐이셨다.
그 후 잦아진 엄마의 전화. 매번 시합일정과 내 스케줄을 물으셨다. 그땐 몰랐었다. 잦은 전화의 이유를. 내 눈물 때문에 나보다 더 힘들고 마음 아팠을 엄마다.
그렇게 짧지만 또 길었던 호주에서의 훈련이 끝나고 나는 광저우에 도착했다.
광저우는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웅장했다. '중국은 땅만 넓지 아무것도 아니야'라는 편견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게 놀라웠다.
선수촌에서의 생활도 새로웠다. 텔레비전에서 보던 유명 선수들을 실제로 보니 신기했다. 같은 운동선수이지만 인기종목의 다른 선수들을 보고 신기해하는 나였다. 정말 우습지만 '사이클 선수 나아름'에게는 이게 현실이었다.
"탕!"
16일 간의 축제가 시작 됐다. 내 첫 경기였던 3km 개인추발은 4등이라는 아쉬움이 남는 성적으로 마치고 다음 경기를 준비해야 했다.
룸메이트 언니와 함께 올라선 포인트 경기 트랙. 두근 거렸다. 어떤 의미에서의 떨림이었는지 아직도 알 수 없다. 다만 정말 기분 좋았던 시작이었음은 확신 할 수 있다.
초반 중위권을 벗어나 세 번째 스프린트(10바퀴)부터 2위로 치고 나가기 시작했다. 페달을 밟는 발에 가속이 붙기 시작했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그런데 38바퀴째에 뜻밖의 사고를 당했다. 바로 옆에서 달리던 홍콩 선수가 넘어지면서 내 자전거에 바퀴를 부딪혀 함께 굴러 떨어진 것이다. 내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그리고 트랙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때였다. 뒤에서 달려오던 중국 선수의 바퀴가 내 등을 밟고 지나갔다.
'내 경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 그렇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나에게 말했다. "아름아, 이제 경기는 끝났어."
두 번째로 찾은 의무실에서 정신을 차렸다.
거울에 비친 내 꼴은 말이 아니었다. 퉁퉁 부은 두 눈, 헝클어진 머리, 지저분한 차림새. 그리고 그치지 않는 눈물.
정신을 차린 후 몇 시간 동안이나 내 양 볼은 마르지 않았다. 비린내 가득한 입안, 따끔거리는 상처, 욱신거리는 치아와 두통은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지도자분들과 동료들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비인기 종목이라는 서러움 때문에 관심 받지 못한 지난날들, 그로인해 더 이를 악물고 훈련했던 시간들 때문에라도 흐르는 눈물을 억지로 그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숙소로 돌아와 멍하니 앉아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엄마에게서 걸려온 전화, 받고 싶지 않았지만 걱정할 엄마를 위해 가짜 목소리와 가짜 웃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또 눈물이 났지만 이번만큼은 엄마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걱정마 엄마 많이 안 다쳤어. 남은 시합 잘하고 갈게!" "괜찮다니 다행이다. 그래 남은 시합 최선을 다하고 와"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고작 이게 전부였다. 엄마와 나의 짧은 통화. 엄마도 슬픈 마음을 비밀로 하고 싶었나보다. 속상한 마음을 알려주고 싶지 않았나보다. '엄마 아빠, 더 열심히 하고 갈게요. 힘낼게요'
그날 밤 주위 사람들을 통해 내 이름이 인터넷 검색어에 올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격려와 응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며, 더 힘내라며 가볍게 건넨 말들이 내게는 큰 힘으로 다가왔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후회와 아쉬움 뿐이었던 첫 아시안게임이었다. 하지만 그 아픔이 내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그래서 나는 웃을 수 있다.
그렇다. 나의 아시안게임은 이렇게 끝났다. 그리고 이제 나는 2012년 런던 올림픽을 향해 출발 한다. 나와 함께 나의 자전거가!
[사진 = KBS 화면캡처]
한상숙 기자 sky@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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