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마이데일리 = 한상숙 기자] 2만 5000명의 관중 중 절반이 한 남자에게 야유를 보낸다. 입에 담지 못할 고성이 오간다. 잠시 후 이번엔 반대편에 있던 1만여 명이 적으로 돌변한다. 어디에도 그들이 온전히 설 자리는 없다. 그들은 이방인이다. 구단과 팬들 사이에서 늘 혼자일 수밖에 없는 존재. 김풍기 한국야구위원회 심판위원을 만났다. 쉬이 털어놓을 수 없었던 그의 뜨거운 속내를 들어봤다.
주심 보는 날이면 TV도 NO!
시즌이 끝나면 선수들은 다음 시즌을 위한 준비에 돌입한다. 짧은 휴식을 취한 뒤 마무리훈련과 스프링캠프로 바쁜 나날을 보낸다. 그렇다면 심판들은 경기가 없는 비시즌에 어떤 일을 할까.
모든 시상식이 끝난 12월 말, 심판들도 4-5일 동안 마무리훈련을 한다. 시즌 동안 있었던 일들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자리다. 1월에는 시즌 내내 떨어져 있었던 가족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갖는다. 1년에 단 한 달.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이다. 3경기 단위로 이동을 해야 하기 때문에 선수들보다 이동 거리가 훨씬 많다. 다음 시즌을 위한 체력 보강도 필수다. 수영, 등산 등 각자 입맛에 맞는 운동을 찾아 체력을 단련한다.
혹시 심판들도 전지훈련을 떠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선수들은 1월 초 스프링캠프를 떠나지만 심판들은 2월 초 출국해 시범경기가 시작되기 전까지 훈련에 참가한다. 잠시 풀어두었던 긴장의 끈을 다시 조이는 시기. 김 위원은 "전지훈련에서 하는일은 경기 진행과 자체적인 훈련 등이다. 경기에 대한 토론을 하고, 몸도 만든다. 선수들과 같은 리듬으로 움직인다. 경기에서 그냥 '스트라이크', '볼'만 외친다고 생각하지 말아 달라. 우리도 사전에 많은 준비를 한다"고 전했다.
경기에서는 5명이 1조가 돼 하루씩 돌아가며 주심을 맡는다. 선수와 마찬가지로 일주일에 6일을 경기장에서 보낸다. 주심을 앞둔 날에는 TV도 켜지 않는다. 눈을 보호해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스케줄과 컨디션은 다음날을 위해 맞춰져 있다.
배탈이 날까봐 음식도 함부로 먹지 않는다. 독감에 걸려 결장하는 선수는 있어도, 아파서 경기에 나서지 못한 심판은 한국 야구가 시작된 이래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들도 사람이다. 늘 건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진통제를 먹고서라도 경기에 나서야 한다. "감기 몸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죽기 직전까지는 경기장에 서 있어야 한다"는 김 위원의 말이 가슴을 찌릿찌릿하게 한다.
화려한 그라운드 보면 쓸쓸…어쩔 수 없는 이방인
심판의 고충에 대해 물었다. 말이 끝나자마자 돌아온 대답은 "이제 그 부분은 포기했다"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심판은 인터넷을 멀리한다. 심판을 욕하는 이는 있어도, 그들의 수고를 격려하는 이들은 적다. 어떤 입장에 서도 가해자의 모양새를 띠는 것이 바로 심판이기 때문이다.
그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는 댓글 하나. '네가 무슨 잘못이 있겠냐. 너를 낳은 너희 부모님이 잘못이지. 밤 길 조심해라.' 자신의 무능함을 탓하는 글은 이해할 수 있지만 가족들을 비난하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같을테고, 그건 심판에게도 마찬가지다.
투수가 던지는 공에 맞으면 등 뒤에 있던 관중들은 큰 소리로 웃는다. 맞아서 고소하다는 뜻의 웃음이다. 교통사고와 비견되는 충격이지만 태연히 마스크를 교체하고 다시 자리에 서야한다.
김 심판은 고등학생과 중학생, 두 아이의 아빠다. 아이들 역시 야구광이지만 아빠와 관련된 기사는 절대 클릭 금지다. 김 심판이 경기에 나서는 날에는 단 한 번도 야구장에 데려오지 않았다. "사람들이 왜 이렇게 아빠에게 욕을 해요?"라는 질문에 아무말도 하지 못한 기억 탓이다.
한국시리즈 마지막 경기의 여파도 적지 않다. 만원 관중에 둘러싸여 경기를 진행한 후 승리팀의 환호를 뒤로한 채 경기장을 빠져 나온다. 심판실에 들어와 옷을 갈아입고 가만히 앉아 바깥의 풍경을 바라본다. 밖에서 보일까봐 불도 켜지 못한다. 캄캄한 심판실에 우두커니 앉아 느끼는 감정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다. "쓸쓸하다고 표현해야 하나? 기장 기분이 묘한 날이다. 너무 허무하다. 불과 10분 전까지만 해도 나도 ?그라운드에 서 있었던 사람인데. 그 때는 완벽한 이방인이 된 느낌이다. 그 기분이 2-3일은 지속되는 것 같다."
야구팬들 사이에서 가장 빈번하게 벌어지는 논란은 스트라이크존에 관한 것이다. 일부 네티즌들은 '김풍기존'이라고 칭하며 김 위원의 스트라이크 판정을 조롱하기도 한다. 이에 대한 김 위원의 생각을 가감없이 전한다.
"심판의 판정을 인정해줬으면 좋겠다. 심판이 볼이라고 선언하면 그 공은 볼이다. 중계 화면을 보고 공이 빠졌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데 중계 카메라도 투수 정중앙에서 촬영하지 않는다. 선수들의 플레이에 방해되기 때문에 약간 옆으로 카메라를 설치한다.
스트라이크와 볼을 하나하나 따지다 보면 끝이 없다. 심판 판정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야구를 가장 재미있게 볼 수 있는 방법이다. 경기장에 들어서면서 늘 나로 인해 피해보는 팀이 생기지 않도록 노력하자고 다짐한다. 최선을 다할테니 판정은 심판 고유 권한으로 맡겨주길 부탁한다."
그래도 야구는 내 인생
프로야구 심판은 선택된 자들의 직업이다. 40명 미만의 사람만 종사할 수 있는 직업이 몇이나 될까. 김 심판은 "우리가 움직여야 선수들도 움직인다. 우리가 '플레이볼'을 외쳐야 비로소 경기가 시작된다. 우리의 몸짓 하나에 선수들과 팬들이 울고 웃는다. 힘든 것도 있지만 이런 매력들 때문에 버틸 수 있다"며 웃었다.
그에게 야구의 의미를 물었다. "야구는…. 내 전부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다. 야구 외에 다른 것은 생각해 본 적도 없다. 야구는 어쩔 수 없는 내 인생의 전부다."
그의 아이들에게 아빠가 경기장에서 큰 소리로 "스트라이크"를 외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조금 더 성숙한 관중 문화가 정착된다면, 야구는 누구에게나 행복하고 즐거운 스포츠로 남을 수 있을 것이다. 인터뷰를 마친 후 얻은 결론은 어느 누구도 그들에게 상처줄 권리는 없다는 것. 그리고 그들도 한 가정의 가장이자 어느 아이들의 아버지라는 것이다. 그들도 야구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글썽이는, 누구보다 야구를 사랑하는 '야구인'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사진 = 김풍기 심판위원]
한상숙 기자 sky@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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