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종합
안녕하세요. KBS N 스포츠 아나운서 정지원입니다.
이제 입사 3개월 차, 프로배구 개막과 함께 정신없이 배구에 입문하며 따뜻한 봄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실 저는 배구를 글로 배웠습니다. 입사시험을 앞두고 '배구, 이렇게 하면 된다'라는 책을 샀고, '네트는 남자 2.43m, 여자 2.24m의 높이로 설치된다'라는 구절에 밑줄을 긋던 'FIVB 배구 규칙서'는 까맣게 변했습니다. 물론 이론과 실제는 크게 달랐습니다.
배구 시즌에 신입 아나운서가 하는 일은 크게 둘로 나뉩니다. 신진식 해설위원과 함께 'V스테이션'이라는 경기를 분석하는 스튜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합니다. 작가는 없습니다. 직접 기록을 정리하고, 원고를 쓰느라 방송 전날엔 늘 새벽 2시가 넘어야 겨우 잠이 듭니다. 현장에 나가서는 경기 전후에 감독과 수훈 선수 인터뷰를 합니다. 새내기 아나운서가 핵심만 뽑아 현장의 생생함을 전달하기가 여간 어려운게 아닙니다.
이번 시즌 모든 배구 경기를 챙겨 봤고, 배구 관련 뉴스는 하나도 빠짐없이 읽었습니다. 신진식 위원의 원-포인트 레슨으로 네트 위로 서브 정도는 넘길 줄 알게 됐고, 쿡 찌르면 나올 정도로 선수들의 신상을 줄줄 꿰고 있습니다. 뒷이야기를 아니 더욱 재밌더군요. 그렇게 저는 '스포츠 아나운서'로서의 버겁도록 행복한 일상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어느새 진짜 배구의 매력에 빠져 지금은 아침에 눈 뜰 때부터 잠들 때까지 배구 생각을 하는 자칭 '배구 홍보대사'가 된 저를 발견했습니다. 동료 아나운서들과 문자를 보내고 통화를 해도, 화제는 대부분 배구, 방송 이야기입니다. 스포츠를 즐기면서 일할 수 있는 저희는 진정 선택받은 행복한 사람들이라며 더 노력하자고 서로를 다독입니다.
때로는 아직 얼굴이 명함이 아닌지라, 경기장에 들어갈 때 신분증을 확인하는 민망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합니다. 늘 노트북과 수첩, 기록지, 자료, 화장품들이 가득 찬 두 개의 가방은 양쪽 어깨를 짓누릅니다. 스포츠 현장의 특성상 근무 일정이 일주일 단위로 나오다보니, 친구들과의 선약은 포기한지 오랩니다. 대신 저는 매일 다른 경기장으로 신나는 소풍을 떠납니다.
제 별명은 '풀세트 전문 아나운서'입니다. 팬들에게는 짜릿하겠지만, 경기 후 인터뷰를 해야 하는 제 속은 타들어 갑니다. 양 팀 모두 이긴다는 전제 하에 4명의 인터뷰를 머릿속에서 정리하는 5세트는 그야말로 좌불안석으로, 쿵쾅쿵쾅 심장이 터질듯 합니다. 하지만 도망갈 곳이 없습니다. 그렇게 어금니 꽉 깨물고 심호흡 한 번 하며 코트로 뛰어 들어가면 어느새 카메라에 빨간불이 들어옵니다.
배구 코트장에서 인생을 배우고 있습니다. 코트매니저를 하다 돌아와 이번 시즌 블로킹 1위 달리고 있는 KEPCO45의 방신봉 선수는 '코트장에 있는 것이 가장 행복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추운 겨울 경기장에 도착해 늘 믹스커피를 타 먹으며 "오늘 꼭 이기고싶다"는 상무신협의 강동진 선수. "내가 해야 할 것만 성실하게 하다보면 언젠가는 상대가 범실할 때가 있을 것"이라는 현대캐피탈의 문성민 선수. "발이 아닌 마음으로 배구를 해야 한다"는 삼성화재의 신치용 감독까지. 늘 환히 웃는 그들이지만, 다들 시련의 과정이 있었던 만큼 겸손하고 지혜롭습니다.
시즌 통틀어 한, 두 번 정도 밖에 돌아가지 않는 선수들을 생각하면 사명감에 머리가 쭈뼛 섭니다. 특히 순위가 낮은 팀들이 이겼을 때는, 인터뷰를 가슴 뿌듯하게 지켜보고 있을 그들의 가족이 먼저 떠오릅니다. 선수들의 진심을 담아내는,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인터뷰어, 따뜻한 아나운서가 되고자 더 많이 공부하고 노력합니다.
지난 두 달간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쉬는 날에도 방송편성표에 따라 움직이고, 영화관에서도 문자 중계를 챙겨봐야 마음이 편안합니다. 어머니는 "왜 가빈은 매 번 껌을 씹냐"고 묻고, 아버지는 "너희 엄마가 KBSN만 틀어놓는다"며 웃습니다. 어쩌면 태어나서 처음으로 효도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합니다. 저에겐 정말 '어메이징한' 2011년, 초심을 잃지 않고 겸손한, 사랑많은 아나운서가 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부족한 새내기 아나운서가 당당히 내미는 마이크에 '우문현답'(愚問賢答)해주는 감독님들과 선수들에게 이 자리를 빌려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사진제공 = 스포츠포커스]
김용우 기자 hiljus@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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