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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지훈 기자의 인디스But구디스] 남성듀오 노 리플라이를 빼고 최근 홍대 신을 이야기할 수 없다. 2009년 6월 발표한 1집 '로드'와 2010년 9월 내놓은 2집 '드림'의 연이은 성공은 '응답 없는' 세상 속에서 꿋꿋이 자신의 울림을 간직하려는 후배 뮤지션들에게 '길'이자 '꿈'이 됐다. '1990년대 웰메이드의 재현'이라는 찬란한 수식어가 부끄럽지 않을 음악적 설득력으로 무장한 채 지난달 첫 단독 공연이었던 '꿈의 시작'을 이틀간 2000석 모두 매진시켰던 노 리플라이는 오는 26일부터 '어쿠스틱 투어'라는 이름으로 홍대만이 아닌 전국을 무대로 길 잃고 꿈 잃은 청춘들을 위로할 예정이다.
이제 전국투어다. 더이상 노 리플라이를 인디로 한정시키는 이도 드물어졌다. 현재 자신들이 어느 지점에 위치한다고 보나.
권순관(이하 권) 많이 알려진 것 맞다. 하지만 여전히 소수의 마니아층만 좋아하는 음악이라고도 생각한다. 음반을 사는 구매층 자체가 적고 음악을 구입하는 소비층 자체가 음원을 다운받는 세대로 낮아진 때문도 있다.
정욱재(이하 정) 예전에는 음악이 알려지면 TV 활동을 하지 않아도 주목도가 높고 스타가 될 수 있었는데 요즘은 힘든 것 같다. 우리뿐 아니라 많은 인디 뮤지션들이 매체에 노출되는 것에 대해 아무래도 벽이 있고 노력한 만큼 대우받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음악시장의 변화가 실제 노래 작법에 있어서도 영향을 끼치나.
정 30초 내로 터져줘야 한다는 부담이 있다. 노래를 듣는 이들의 인내심 부족도 느낀다. 외국 밴드는 전주부터 길고 장중한 경우가 많은데 신경 안 쓰려고 한다.
단독 공연도 했는데 이제 무대 울렁증은 극복했나.
권 자신감이 많이 생겼다. 2집 발표하고 공연장에 점점 사람이 많아지면서 울렁증이 심해졌다. 카메라 앞에서도 굳어버리고 떨었다. GMF 때가 절정이었는데 많이 힘들어 한 만큼 노력도 더 해서 자신감이 생겼다.
정 '스케치북'이나 '랄랄라'말고 '음악중심' 같이 우리 음악을 모르고 아이돌 그룹이 많은 프로그램에 나간다면 완전 굳을 것 같다(웃음).
노 리플라이 공연장을 가면 여성관객이 대다수다.
권 남성팬 증가를 위해 한효주씨와 무대에 섰는데 실패했다(웃음). 간혹 '라이브를 못 한다' 등 안 좋은 글을 올리시는 분도 남자들이더라. 이 때문에 2집에 밴드사운드도 추구하고 국카스텐 형들처럼 '간지나게 놀아보자'고 어깨에 힘도 줘 봤는데 오히려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간지남'은 무리수다. 차분하게 가려고.
정 우리의 노랫말이나 스타일 자체가 여성들이 좋아하는 코드가 있는 것 같다. 우리 전에 요조나 한희정 누나 등 여성 아티스트가 강세였던 점에서 변화한 측면이 있다. 우리와 색깔은 달라도 10cm나 메이트도 마찬가지다.
옥상달빛은 권순관씨를 가리켜 '여자를 정말 잘 아는 남자'라고 칭하더라.
권 완전 오해다(웃음). 말만 잘 하는 사람이다. 어디서 보고 들은 건 많고 이론에는 강한데 실제로는 잘 못한다. 그런 건 있다. 가사를 쓸 때 개인적인 경험에서 나온 이야기를 담는다. 좋아하는 음식을 먹고 누구를 울렸던 일들. 거기서 파생된 느낌들을 솔직하게 써 나간 게 여성팬들에게 자극이 됐을 수는 있다.
정 이번에 정말 잘 된 10cm도 가사를 보면 깜짝 놀랄 정도로 과감한데 여성팬들이 좋아한다. 동거를 설정하고 '양말 한 짝' '감기약' 이런 디테일한 면들이 어필했다는 게 홍대 신의 다른 뮤지션들에게도 자신감을 줬고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노 리플라이를 아예 모르는 이들을 위한 질문을 이어가겠다. 처음에 어떻게 만나게 됐나.
권 17년된 안양 동네 친구다. 어릴 때부터 음악하는 동네 형, 동생이었다. 계속 음악적 교류는 있었고 기타가 필요할 때 욱재에게 무보수로 요청했고 스트링 편곡이 필요하면 역시 내가 해 줬다. 그러다 유재하가요제에 나가게 되면서 팀이 만들어진 거다.
'노 리플라이'라는 그룹 이름도 그 때 탄생한 것인가.
권 유재하가요제 앞두고 부랴부랴 만들었다. 비틀즈와 칸노 요코의 노래 제목이기도 한데 회사와 계약할 때는 부정적인 느낌이라 '노'를 빼고 '리플라이'로 가자고도 했다. 하지만 임팩트가 없어 보여 밀어붙였다. 당시에도 '무플방지위원회'라는 팬클럽이 100명 정도 됐었는데 그들을 배신할 수도 없었고. 오히려 부정적인 그룹명에서 밝은 음악을 하는 등 그룹 이름에서 연상되지 않는 다양한 시도를 하는데 도움이 됐다.
국내외적으로 많은 뮤지션들의 영향을 받았을 것 같은데.
이구동성 너무 많죠.
정 단 한 장만 꼽으라면 푸 파이터스의 가장 최신 앨범인 'Echoes, Silence, Patience & Grace'를 들겠다. 국내 음반은 이적씨의 '나무로 만든 노래'가 가장 짜임새있다고 생각한다. 가장 처음 산 CD, 아니 테이프는 서태지와 아이들 아니면 넥스트일 거다. 큰 형 덕에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그들의 음악을 들었다. 지미 헨드릭스와 너바나는 모든 음반을 소장하고 있다.
권 팻 메스니를 가장 좋아하는데 그의 라이브 음반인 'The Road to You: Recorded Live in Europe'이다. 메스니 음반 40여장을 모두 갖고 있는데 관리를 잘 못하는 성격이라 20장 정도밖에 남지 않은 것 같다. 국내로는 20살 때였나. 학원 끝나고 레코드샵에 들렀는데 새로 나온 음반을 들을 수 있게 헤드폰을 설치하잖나. 헤드폰을 들고 1번 트랙의 피아노 전주를 듣는 순간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 음반이 김광민씨의 '보내지 못한 편지'였다. 고등학교 때 록밴드하면서 스틸하트의 'She's gone'같은 것도 부르곤 했는데 이후부터는 연주곡만 만들었던 것 같다. 가장 처음 산 음반은 서태지와 아이들이었던 것 같고 '마법의 성'이 담긴 더 클래식 1집도 기억난다. 명반이었다.
그러면 다시 노래를 부르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권 유재하가요제 나가느라 노래를 다시 하게 됐다(웃음). 대회 후에도 객원보컬을 구하려고 했는데 당시에는 다들 소몰이 창법만 하던때라 맞는 보컬을 찾기가 어려웠다. 2집 앨범 때도 키를 좀 낮출 걸 후회하기도 했다.
1집의 성공이 부담됐을 법도 한데 1년 3개월만에 생각보다 일찍 2집을 내놓았다. 3집도 서두를 생각인가.
정 당초에는 더 빠른 지난해 3월에 2집을 내놓을 스케줄이었는데 공연 등이 겹치면서 오히려 늦어진 거다. 그래도 해를 넘기지 말자는 생각에 정말 타이트하게 스케줄을 맞춰 내놓은 셈이다. 스튜디오 2-3개 동시에 돌리면서 건강 상 문제도 생겼다. 빠듯한 상황에서도 회사와의 약속을 지켜나갔다는 점에서 큰 수확이다. 커뮤니케이션에서 배운 점이 많다. 우리 둘뿐 아니라 회사, 많은 스태프들과도 다양하게 이야기하면서 귀를 열고 공감대를 얻는 법을 익혔다.
권 반응은 좋았지만 우여곡절이 많은 음반이었다. 내가 다그쳐야 작업을 하는 스타일은 맞는데 원래 생활패턴이나 흐름에 맞지 않은 편이었다. 열을 생각해서 만들 곡들을 하나, 둘만에 해치워야 하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3집은 시간에 연연하지 않고 곡이 모두 준비된 상태에서 내놓을 생각이다. 나 역시 커뮤니케이션에서 큰 수확이 있었다고 본다.
정욱재씨의 군 문제도 있다.
정 한국국제협력단(KOICA)에 지원한 상태다. 합격한다면 올해 내로 군입대할 예정이다. 3집이 군 제대 후로 연기될 수도 있는데 알아봤더니 활동이 가능할 것도 같더라. 외국에 나갈 때도 최소한의 장비는 갖고 갈 생각이다. 새 음반에 충분히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튠 프로젝트에서는 노 리플라이에서 하지 못하는 것 중 무엇을 가장 중점에 두나.
정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환경 운동이다. 사회적인 어필을 하면서 강한 사운드의 푸 파이터스와 편안하고 목가적인 잭 존슨의 상이한 접근법이 있다고 보는데 중도를 지킨다는 생각이다. 평소에도 환경운동가로 인터뷰도 자주 하고 열심히 일하고 있다.
2집에서도 이승환, 데이브레이크의 김선일, 나루 등 뛰어난 뮤지션들이 참여했는데 새 음반에 참여해 줬으면 하는 뮤지션 있나.
권 유희열 선배님과 루시드폴 선배님이다. 유희열 선배님은 노래 말고 나레이션해 주셨음 좋겠다(웃음). 루시드폴 선배님은 가사가 정말 좋다.
정 우리가 음반 작업할 때 큰 간섭은 없고 편곡도 작곡자 위주로 가는 게 맞다고 보는데 가사 부분이 가장 민감하다. 회사에서도 가사에 신경을 많이 쓰는데 루시드폴 선배님이 써 주신다면야.
노 리플라이만의 색깔이 선명해진만큼 스트링 세션 등 노 리플라이 스타일을 답습한다는 우려가 제기되기도 했다.
권 작법에 한계를 느끼기도 했다. 1집 좋아해 주신 분들을 위해 2집에 이어간 것도 맞다. 하지만 변화도 많이 줬다. '위악'이나 '안락의자'에서 록 사운드를 강조한 것도 이 때문이다. 아무래도 타이틀 곡 위주로 들리다 보니 그런 이야기가 나온 것 같다. 우리의 색깔이 뭉뚱그려진 콘셉트 음반이라는 색깔은 지켜나갈 생각이다.
정 우리가 2집을 안 내고 '내가 되었으면'이 1집의 후속곡인줄 아는 분들도 많다. 아티스트로서 수개월동안 앨범을 만든다는 것은 EP를 자주 내 놓는 것과는 다르다고 본다. 중요한 성장판이 됐다.
권 뮤지션이자 작곡가로서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기대할 수 있는 신뢰받는 아티스트가 되고 싶다. 20대 때 너무 조급하고 천방지축이었는데 올해 서른살이 되면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인터넷을 통해 글들을 다 찾아보는데 큰 힘이 된다. 죽을 때까지 끝까지 사랑받는 뮤지션이 되고 싶다.
정 포지션 자체가 다른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다 보니까 정신 없을 때도 있는데 뮤지션과 환경운동가를 융합시켜서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다. 우리 형들 보면 직장 다니고 결혼해서 아이 낳고 평범하게 사는데 그게 제일 부럽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 같고 궁극적으로 아내와 아이와 행복하게 사는 게 가장 큰 꿈일 것 같다. 결혼은 우선 군대 다녀온 뒤 생각하겠다(웃음).
[사진제공 = 해피로봇레코드]
강지훈 기자 jhoon@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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