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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은 좋을수록 좋은 거잖아요! [드라마작가 지망생 김현철씨]
드라마는 추억이었습니다
글 쓰는 걸 좋아했습니다. 아니, 글 쓰는 걸 좋아했다기보다는 쓴 글을 남에게 읽히는 걸 좋아했다고 보는 게 더 맞을 것 같네요. 읽은 사람이 재미있다며 박수를 쳐주는 것도 좋았고, 이것저것 트집을 잡아 걸고넘어지는 것도 좋았어요. 최소한 내가 쓴 것에 관심은 가져줬다는 거니까요.
드라마를 보는 것도 좋아했지요. 정확히 말하면 드라마를 보는 사람들을 살피는 걸 좋아했던 것 같아요. TV 앞에 앉은 사람들이 평소엔 바보상자라고 부르며 멸시하던 그 기계 속 살림살이에 신경 쓰며 때론 박수를 치며 좋아하고, 어떨 땐 눈물을 펑펑 쏟아내는 게 어린 마음에 신기했던 것 같습니다.
어릴 적 신기하게 봐왔던 TV 앞 사람들처럼, 나 역시 드라마에 울고 웃으며 철이 들었지요. 고등학교 시절 야간 자율학습을 끝내고 돌아오자마자 티비를 켜도 마지막 20분 남짓밖에 못 보던 '허준'이 왜 그렇게 꿀맛이던지. 한일 월드컵이 끝나고 허전한 마음을 채워주던 '네 멋대로 해라'도, 군대시절 김태희가 나온다는 이유만으로 '러브스토리 인 하버드'를 고수하던 고참들 때문에 보지 못했던 '미안하다, 사랑한다'도, 한창 사랑에 빠져 있을 때는 모르고 이별 후에나 알 수 있는 애틋한 감정을 고스란히 전해줬던 '연애시대'도, 모두 그때 제가 살던 모습을 추억하게 만드는 드라마들이었습니다.
재미없는 이 시간이 추억이 될 수 있을까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요. ‘그 때를 생각나게 하는’ 드라마가 사라져버린 게. ‘추억과 찰싹 달라붙어 있는 유행가 같은 드라마’를 써보겠다고 드라마 공부를 시작하면서부터였을 거예요. 가장 좋아하는 건 일로 삼지 말라는 말이 있는데, 그걸 무시한 벌인가 봅니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말이 있는데, 그건 이 말씀을 하신 공자님이 성인이라서 그랬던 거 아니었나 싶어요.
새로 시작하는 드라마를 꼬박꼬박 챙기고, 같이 공부하는 지망생 친구들이 써오는 대본을 읽고, 앞으로 써야할 소재들을 정리하며 매일같이 이야기 속에 빠져 살다 보니, 정작 이야기가 전해주는 재미를 좀처럼 느끼게 되지 못하게 되어버렸습니다. 재미있는 드라마를 봐도 어디가 잘됐고 잘못됐는지 분석하는 습관이 들었고, 가끔 넋이 나갈 정도로 좋은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엔 ‘나는 왜 저런 걸 쓰지 못하는 걸까’하며 질투와 자조 섞인 마음이 되어 괴롭기만 했지요.
친구와 이야기를 하던 중 ‘요샌 재미있는 일이 없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요즘 또래 친구들을 만나면 이런 얘기를 많이 들어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내일이 없을 것처럼 밤낮 가리지 않고 놀았었는데, 이제 모두 자리를 잡고 ‘생계’를 걱정해야 할 나이가 되어버린 거죠.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게 ‘노는 게’ 아닌 ‘일’이 되어버렸으니, 이런 말이 나올 법도 해요. 그런데 이런 ‘재미없어’라는 말 뒤에 이어지는 건 언제나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한 불만이나 괴로움에 관한 이야기에요. 제가 보기엔 정말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멋지게 해내고 있는 친구들인데 말이죠. 아무리 좋아하는 거라 해도 일이 되면 괴로운 건 저만의 일이 아닌가 봐요. 가끔은 이렇게 재미없게 살고 있는 요즘이 추억이 될 수 있을까 하고 걱정하기도 하지요.
그런데, 요즘 인터넷을 돌아보면 억지로 ‘일’을 만드는 게 많이 보여요. 신작이 방영되면 게시판에 전문가 뺨치는 솜씨로 분석을 하는 사람도 있고, 작품에 대한 근거 없는 찬사를 늘어놓는 빠돌이와 좋은 점은 무시하고 무조건 까기에 바쁜 안티 사이의 논쟁은 절대 빠지지 않는 감상평 게시판의 단골손님이죠. 물론 적절한 비평은 작품을 즐기는 방법이자 더 좋은 작품을 바라는 피드백이 될 수 있지만, 가끔 게시판 말대로 ‘재미없으면 안 보면 그만’인데 왜 볼 것 다 봐 놓고 저렇게 투정일까 하는 생각도 들 때가 있어요. 보고 즐거웠으면 하고 만들어진 드라마를 일처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거지요.
추억은 좋을수록 좋은 거잖아요
‘무드셀라 증후군’이란 게 있지요. 옛날 일은 다 좋아 보이는 거요. 예전에 헤어진 연인과의 기억이 지금 곁에 있는 사람보다 더 좋았던 것처럼 느껴진다거나, 학창시절은 그저 친구들과 고민없이 즐겁게 보냈었던 것 같았다거나, 심지어는 군 생활이 가끔 그리워진다거나(!). 생각해보면 드라마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아요. ‘사각관계에, 재벌집 아들에, 시한부까지... 뻔한 신파’라고 까임을 당했던 <가을동화>는 플루트 소리가 좋았던 타이틀 음악과 지금은 빅스타가 된 송혜교, 송승헌, 원빈, 한채영의 풋풋하고 예쁜 모습을 볼 수 있는 완소작품으로 남았습니다. 지금 소위 명작이라 불리는 드라마들도, 방영되던 때엔 제 나름 ‘까임’의 시련을 겪었더랬지요. 하지만, 문제는 그때랑 지금은 그 ‘까임’의 양상이 조금 다르다는 데 있어요.
어릴 적 친구와 나누던 드라마 이야기는 즐겁기만 했었습니다. 시청자의 입장에서 ‘그 부분이 좋았어’, ‘앞으로 이야기는 이렇게 됐으면 좋겠다’하면서 같이 상상하고 공감할 수 있었거든요. ‘그거 재미없는데 왜 보냐?’라고 말하는 친구는 이야기에 낄 수 없었죠. 하지만, 요즘은 듣기 싫은 친구의 목소리를 억지로 듣게 되는 세상이에요. 인터넷 게시판에서는 끊임없이 ‘그거 재미없는데 왜 보냐’는 눈치 없고 악의에 가득 찬 외침이 들립니다. 결국 드라마를 보는 것도, 그것에 대한 느낌을 적는 것도 ‘그때의 자신’만이 가질 수 있는 추억인건데, 꼭 저렇게 ‘나쁜 기억’을 남겨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재미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보는 드라마가 과연 좋은 추억으로 남을 수 있을까요. 한번 만들면 살아가면서 오랫동안 곱씹게 될 추억인데, 좋을수록 좋은 거 아니겠어요.
김현철씨(29)는 서강대 국문과를 졸업한 드라마 작가 지망생이다. MBC 프로덕션과 한국방송작가협회 교육원 드라마 과정을 수료했다. 드라마 '천하일색 박정금' 보조작가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도서출판 푸른숲에 재직한 바 있다.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위), 김현철씨(아래). 사진 = KBS 제공]
이은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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