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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다. 삶은 언제나 빠르다. 무던히도 안 가던 시간은 어느새 흘러 여름이 되었다. 나의 스물여덟 번째 여름. 어릴 적 여름은 그저 덥고 후텁지근하기만 한 계절이었다. 바닷가에서 온 몸에 물을 흠뻑 적시고, 살을 불게 태우다 보면 지나가는 그런 계절. 하지만 여름의 다른 의미를 깨닫게 해준 것이 있다. 바로 록 페스티벌.
뜨겁게 타오르는 태양이 물러나고 어둠이 내려앉을 즈음, 록 페스티벌에는 새로운 태양이 떠오른다. 어둠을 삼킬 것 같은 기세로 연주하는 밴드들과 그에 열광하는 관중들이다. 이들이 만들어 내는 열기는 여름의 태양보다 뜨겁다.
우리나라 록 팬들은 세계에서 둘째라면 서러울 정도로 잘 놀기로 유명하다. 2009년 ETP FEST에서 림프 비즈킷이 '테이크 어 룩 어라운드(Take a Look a round)'를 연주 중 보컬 프레드 더스트는 관객들에게 다들 앉으라고 외쳤다. 하지만 우리 관객들은 앉다 말고 갑자기 파도타기 시작했다. 잠실 경기장은 이내 파도로 넘실댔고 프레드는 쉽사리 보지 못했던 이 광경에 감탄했다고 한다.
소위 놀 줄 아는 우리나라 페스티벌고어(festivalgoer)의 역사는 9년 전으로 거슬러 간다. 내 첫 록 페스티벌 이기도 했던 레드 핫 칠리 페퍼스(Red Hot Chilli Peppers. 이하 RHCP)의 공연이었다. RHCP와는 인연이 많은 제인스 애딕션, 월드컵 응원가로 인기가 치솟던 YB, 그리고 크라잉넛과 레이지본이 한 무대에 섰던 2002년의 ‘One Hot Day’. 이 공연은 여러 밴드가 대낮부터 늦은 밤까지 야외에서 대규모 공연을 했다는 점에서 최초의 록 페스티벌이라 할 만하다.(이에 앞서 트라이포트 록 페스티벌이 있었지만 폭우로 취소된 바 있다)
이 공연에선 레이지본의 일본인 트럼펫 주자가 스트리킹(발가벗고 대중 앞에서 달리는 행위)을 감행해 화제가 됐다. 당시 많은 수의 여성 팬들이 있었는데 그의 스트리킹에 소리를 지르면서도 모든 순간을 상세히 바라보며 적나라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이 공연에서 기억에 남는 건RHCP 공연 때였다. 당시는 미선이, 효순이 사건으로 반미 감정이 악화된 시기였는데, 미군들이 버스를 빌려 공연 관람을 하고 있었다. 이를 본 몇몇 우리나라 관객이 무등을 탄 채로 미군들에게 손가락 욕을 했고, 그들 역시 무등을 타고 손가락 욕으로 응수했다. 싸움이 나지 않을까 걱정됐는데, 어째서인지 한국인이건 미국인이건 그 순간을 즐기는 듯 했다. 아마도 서로에 대한 이해가 있었고 또한 록팬이라는 묘한 동질감이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그렇게 월드컵과 'One Hot Day'로 뜨거웠던 2002년의 여름이 지나가고 한동안 록 페스티벌은 없었다. 하지만 2006년 트라이포트의 정신을 이어 받은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이 개최됐다.
게다가 1999년의 트라이포트 기획자였던 김형일 씨가 돌아온 것도 당시 록 팬들 사이에서는 화제였다. 게다가 라인업 또한 신선했다. 한물간 밴드만 와서 망할 것이라는 비관론을 멋지게 날려버리듯,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블랙 아이드 피스와 더 스트록스 등이 출연하였고, 그들의 퍼포먼스 또한 대단했다
2008년 드디어 나는 제대로 된 록 페스티벌인 펜타포트 2008에 가게 되었다. 별명이었던 펜타포트 머드 페스티벌 답게 그 해에도 비가 퍼부었고 땅은 완전 진흙 천지였다. 하지만 그마저도 즐거웠다. 진흙 밭은 찰진 밥과 같이 부드럽게 느껴졌고 무더움은 사람들의 열기에 묻혀 느낄 수 조차 없었다. 난생 처음 보는 사람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강강술래라도 할라치면 중간중간 더 많은 사람들이 끼어들었고, 판은 점점 커졌다. 그렇게 커다란 원이 만들어지면 다 같이 빙글빙글 돌다가 각자의 춤을 췄다.
일부 과격파들은 슬램을 하기도 했다. 슬램판은 더 없이 따뜻한 공간이었다. 우리 서로가 열기를 서로에게 발산하며 즐거움을 표출할 수 있었고, 진흙 밭에 넘어지면 그 즉시 수많은 손이 일으켜 세워주는 배려가 있었다. 이게 끝이 아니다. 록 페스티벌 에서는 기차 여행도 할 수 있다. 누군가 기관사가 되어 선두에 서면 순식간에 기차놀이가 시작됐다. 크래쉬의 공연을 보고 탈진해 있던 남자도 코린 베일리 래의 노래에 심취해 잔디밭에 누워있던 여자도 하나가 됐던 아름다운 2008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이었다.
그렇게 영원히 아름다울 것 같았던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은 아쉽게도 지산밸리 록 페스티벌와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로 나뉘게 되었다. 크지도 않은 공연판에 페스티벌만 많이 생긴다는 우려가 컸고, 몇 가지 우려사항이 현실화 되기도 했었지만 지금은 두 페스티벌 다 각자의 색을 공고히 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먼저 각 페스티벌의 대표 선수부터 알아보자.
지산록페에는 더 케미컬 브라더스, 그리고 펜타포트에는 콘이 있다. 지산에서는 퍼포먼스가 결합된 영상연출이 끝내주기로 유명한 더 케미컬 브라더스가 작년의 펫샵보이즈의 드라마틱한 무대연출을 뛰어넘는 멋진 무대로 높아진 관객들을 만족 시켜줄 수 있는지가 중요 포인트이다. 최근의 코첼라 공연을 보면 사람을 자지러지게 만드는 이들의 능력은 업그레이드 되고 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펜타포트에 오는 콘은 이번이 세 번째 내한이다. 무한히 분화해 가던 하드코어 씬에서 자신들의 음악적 뚝심을 지켜낸 힘과 보컬인 조나단 데이비스의 카리스마가 조화된 이들의 공연은 정말 힘이 넘친다. 아마 펜타포트에 가는 록팬들의 대부분은 콘의 불후의 명곡인 '블라인드'를 기대할 것이다. 전주부분에서 앉아있다가 조나단이 터트리는 사자후 'Are You Ready!'에 미친듯한 점핑과 슬램을 말이다.
헤드라이너 팀과는 별개로 각 페스티벌에서 공연이 기대되는 팀은 따로 있다.
지산록페에서는 델리스파이스와 인큐버스의 공연이 기다려진다. 우리나라 인디씬의 1세대로서 ‘고백’, ‘차우차우’ 등의 메가히트 넘버를 보유한 밴드의 오랜만의 무대 나들이가 정말 반갑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맛없는 불량식품 같은 음악만 양산했던 2000년대 초반의 하드코어 씬에서 멋지게 변신하여 살아남은 인큐버스의 공연이 기다려 진다. 이들은 공연에서 별다른 무대효과 없이 음악에 집중하는 무대로 유명하지만 다 이유가 있다. 잘생기고 몸매 또한 훌륭한 매력남 브랜든 보이드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브랜든이 공연중 상의를 벗으면 여성 팬들의 환호성은 소녀시대 공연장에서의 오빠 팬들의 환호성을 능가할 것이다.
펜타포트에서는 단연 이디오테잎과 내귀의 도청장치가 주목할만 하다.
Intel이 주최했던 크리에이터 프로젝트에 다양한 분야의 아티스트들과 함께 참여했던 이디오테잎은 슈가도넛의 드러머이기도 한 DR이 속한 유닛이다. 인디씬에서 드럼실력과 미친듯이 신나는 드러밍으로 알아주는 DR이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듯 이들의 음악은 굉장히 생동감 넘친다. 특히 라이브에서 진가를 발휘하는 디제잉+드러밍은 그들만의 온전한 음악적 지문이다.
그리고 내귀의 도청장치는 어김없는 이들의 코스프레 퍼포먼스가 궁금해진다. 난 아직도 유명 코스플레이어인 체샤가 이끄는 날으는 바늘이 제작한 Detroit Metal City 의상을 입고 했던 그들의 도착적인 퍼포먼스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한복을 적절히 차용하여 굉장히 섹슈얼한 분위기 넘치는 무대였는데 아마 한국에서 다시 보기는 힘들 것이란 생각이 들 뿐이었다. 이 무대 위 카리스마의 제왕들의 퍼포먼스가 너무나 기대된다.
올해도 여름은 어김없이 왔고 이 여름을 달구기 위해 지구 반대편에서 온 밴드들, 홍대클럽에서 실력을 갈고 닦은 밴드들, 몇 달씩 고생한 스태프들이 록팬들을 위해 페스티벌을 준비하고 있다. 일찍 시작된 장마와 무더위를 한 달만 이겨내면 된다. 상사로부터 들었던 잔소리와 취업 스트레스도 모두 한번에 날려버리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그곳. 내 심장을 두고 온 그 곳, 록 페스티벌. 난 내 심장을 찾으러 록 페스티벌에 갈 것이다. 회사 상사에게 상처받아 허물어진 내 가슴에 심장을 장착하고 살아있음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내년을 기약하며 마지막 불꽃놀이와 함께 어느 곳엔가에 고이 묻어두고 올 것이다.
[사진 = 2011 지산 록 페스티벌(위)과 2011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 포스터]
이승록 기자 roku@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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