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3-0 역사적인 참패 기록한 한국 대표팀, 무엇이 문제였나?
일본 해설자: (흥분한 목소리로) "지금까지의 설움을 풀어주는 건가요? 한국을 상대로 이렇게 압도적인 경기는 없었습니다! 역사상 처음일 겁니다!"
이보다 더 나쁠 순 없었다.
운이 나빴다면 5-0도 가능한 경기였다. 한국인이 생각해낼 수 있는 가장 최악의 한일전을 떠올려도 이보다 경기내용이 나쁘긴 어려울 것이다. 신체조건과 피지컬 등 본래 갖춰진 것을 제외하고, 경기적 측면에서 일본 대표팀보다 어느 것 하나 나은 것 없었던 완벽한 패배였다. 한국의 각 언론은 이 경기를 '삿포로의 치욕'이라 표현하며 대대적으로 한국 대표팀의 패배 소식을 전했다.
사실 이번 경기는 한국팀의 고전이 어느 정도 예상됐던 경기였다.
이 경기는 박지성, 이영표 선수의 국가대표 은퇴 이후 처음으로 갖는 한일전이었고, 손흥민, 이청용 등 주축 공격수가 건강 이상 및 부상으로 불참했기 때문이었다. 지동원 선수도 소속팀 적응을 이유로 불참했다.
지난 1월 열린 아시안컵 4강 한일전에서는, 박지성, 이영표 선수 등 주전 선수들이 모두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을 상대로 매우 어려운 경기를 펼쳤다. 결국 승부차기 끝에 한국 대표팀은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그때 멤버와 거의 변함이 없고, 계속 손발을 맞춰온 일본을 상대로, 완전치 못한 한국이 어려운 경기를 펼치리라는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이번 패배는 그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지독한' 패배였다. 오히려 공격진보다는 3점 이상 실점한 수비진이 더 큰 문제였다. 3점 이상 실점한 한일전은 1974년 9월의 1-4 대패 이후 37년만이다.
한국 대표팀의 대패의 원인은 도대체 무엇이었던 걸까?
▶ 리더의 부재 - 쉽게 흥분하는 대표팀, 분위기 다잡는 선수 아무도 없어
이날 한국 대표팀은 이상하리만큼 흥분을 제어하지 못했다. 그 대표적인 모습이 바로 전반 18분경에 기성용이 보여준 태도였다.
전반 18분, 혼다가 공중볼을 차기 위해 발을 높게 들어올렸다가 기성용의 머리를 차게 됐다. 이로인해 잠시 중단됐지만, 이내 경기가 재개됐다. 재개된 후 얼마 뒤 혼다가 공을 잡았고, 기성용은 곧바로 깊은 태클을 날렸다. 불필요한 태클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명백한 보복성 태클이었다. 결국 그는 심판으로부터 옐로우 카드를 받았다.
한일전이라는 경기 특성상 감정이 격해질 수 있지만, 이날은 조금 도가 지나친 모습이었다.
물론, 상대와의 기싸움에서 지지않기 위해 경기에서 터프함을 보여주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감정이 지나치게 과열되면 경기에 악영향을 끼치기 쉽다. 이날 한국 선수들이 그랬다. 김정우, 기성용 선수를 비롯한 많은 선수들이 불필요한 태클을 남발했고, 감정적으로 격한 모습을 자주 보여줬다.
전반 34분 가가와 선수가 첫 골을 기록한 이후 이 같은 모습은 더욱 자주 연출됐다. 한국 선수들은 성급했고, 일본 선수들은 냉정했다. 후반 초반에는 일본의 패스 플레이에 한국 선수들이 거의 '농락'당하는 모습이었다. 후반 10분경까지 이어진 일본의 파상공세 속에 한국은 각각 후반7분과 후반 9분에 2골을 내줬다.
여느 때 같았다면, 대표팀의 가장 고참급 선배가 나서, '침착해'라며 한 마디해야 했을 상황이었다. 2002년의 홍명보가 그랬고, 그 이후는 이영표, 박지성 등이 그 같은 역할을 해왔다. 이들이 없는 지금, 한국 대표팀에서 그런 역할을 해주는 선수가 없다. 대표팀 주장인 박주영이나 이정수, 혹은 차두리가 그런 역할을 담당해야 하지만, 이번 경기에서 직접 나서 팀을 진정시키려 한 선수는 없었다. 대표팀을 뒤에서 떠받치는 '정신적 지주'가 없었던 것이다.
경기 막판까지도 선수들은 성급함을 버리지 못했다. 후반 종료 15분 전부터 계속된 한국의 파상공세 속에서 골과 다름없는 기회가 여러차례 있었다. 그러나 구자철, 김신욱이 여러차례 기회를 잡았지만, 그들의 슛은 매번 골대를 크게 빗나갔다. 골문 바로 앞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최근 한국 대표팀 선수들에게서 쉽게 볼 수 없었던 모습이다. 침착함이 아쉬운 순간이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무섭도록 냉정하고 침착했던 일본팀이었다. 이들은 한국의 격한 플레이에 일절 격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한국의 막판 파상공세도 침착하게 잘 막아냈다. 혼다 선수가 가끔 무리한 개인 플레이를 보였던 것을 제외하고는 완벽에 가까운 경기 운영을 보여줬다. 자케로니 감독도 경기가 끝나는 그 순간까지 '콤팩트, 콤팩트(짧고, 간결하게!)'를 외치며 선수들을 독려했다.
▶ 조광래식 축구의 실종
조광래식 축구라 하면 떠오르는 것은 세밀한 패스 전개다. 이 같은 조광래식 축구를 축구팬들은 '만화 축구'라 부르고 있다. 만화처럼 아기자기하고 세밀한 패스 축구, 거짓말 같은 패스 축구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이 같은 별명이 붙여진 것이다.
그러나 이번 한일전에서 조광래식 '패스 축구'를 볼 수 있었던 것은 막판 15분 정도였다. 그것도 일본의 주축 미드필더가 대부분 교체된 상황의 일이었다.
옛부터 세밀한 패스 플레이를 추구해왔던 패스 축구의 '원조'인 일본 앞에서 조광래식 축구는 여지 없이 무너졌다. 한국은 경기 초반부터 전방위 압박에 들어갔지만, 일본은 너무나 손쉽게 패스를 돌렸다. 일본의 탈압박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다. 한국팀의 압박이 비효율적이고 투박했기 때문이었다. 압박 자체도 느슨했다.
이날 2골을 기록한 가가와 선수가 경기 후, "한국 선수들이 못 따라오더라(바로 압박해들어오지 않더라)"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한국팀이 여태껏 보여왔던 강한 피지컬과 체력을 바탕으로 한 유기적인 압박은 온 데 간 데 없었다.
오히려 역으로 일본의 압박과 패스워크에 여지없이 무너졌고, 패스는 번번이 차단됐다. 10일의 한일전 경기 전망 기사 '한일전, 한국팀 고전 예상된다'에서 우려한대로, 이근호, 구자철이 이청용, 박지성의 빈자리를 채우기에는 너무 부족했다.
이근호는 이날 수비 가담 능력이 돋보였지만, 번번이 공을 빼앗기며 상대팀의 역습을 초래해 실점의 빌미를 제공했다. 구자철 또한 소속팀에서 선발에 나서지 못한 탓에 경기 감각이 좋지 못했고, 기대 이하의 플레이를 보여줬다.
기성용 또한 이날 두드러진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 중원을 지휘하며 볼을 배급해야 했지만, 제대로 된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 체력적인 이유도 있는 듯했다. 그는 경기 후 인터뷰에서 "소속팀에서 경기를 뛴 지 이틀만에 경기를 뛰어서 체력적으로 힘들었다"고 밝혔다.
기성용과 이용래 등 중앙 미드필더진이 고생한 것은 공격수들의 부진도 한 몫했다.
자케로니 감독은 이번 한일전 직후 기자회견에서 이 같이 밝힌 바 있다.
"후반 막판 15분 간 한국에 파상공세를 당한 것은, 엔도와 하세베 등 중앙 미드필더를 교체했기 때문이 아니라, 전방의 가가와, 혼다, 이충성 등의 플레이가 무뎌졌기 때문이다. 이들이 지친 탓에 움직임이 줄어들었고, 중앙 미드필더진에게 (어느 곳에 패스할 지, 어느 곳으로 공격을 전개시켜나갈 것인지에 대한)선택지를 제공하지 못했다."
이는 한국에게 그대로 적용되는 말이었다. 전방, 측방에서 공격 기회를 노렸던 박주영, 구자철, 이근호의 부진으로, 중앙미드필더에게 선택지를 부여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이청용, 박지성의 부재가 절실히 느껴지는 대목이다. 원톱 박주영과 이근호, 구자철 등 측면 미더필더의 부진, 기성용(그리고 차두리)의 체력 문제 등 이날 한국 대표팀이 부진했던 원인은 매우 복합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조광래식 축구가 무너진 결정적인 원인은 바로 수비진이었다. 조광래 감독은 경기 종료 후 인터뷰에서 수비진의 계속된 부상으로 수비가 무너진 것이 패인이라고 밝혔다.
이날 이영표 자리에 들어갔던 김영권이 전반 23분 부상으로 박원재로 교체됐고, 박원재마저 부상을 입어 전반 36분 또다시 박주호로 교체됐다. 이 같은 잦은 교체 상황 속에서 수비가 크게 흔들렸다는 것. 실제 이날 한국팀 수비수들은 번번이 뒷공간을 내주며 크게 고전했다. 미드필더진 싸움에서 밀린 탓도 컸지만, 한국 수비수들도 위기 상황에서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가장 큰 문제는 이영표가 떠나고 수비를 현장에서 진두 지휘하는 선수가 없었다는 점이다. 이정수 선수도 이 점이 못내 아쉬웠는지 경기가 끝난 뒤 인터뷰에서 "수비가 무너졌다. 이재성에게는 대표팀 첫 경기였기 때문에 내가 잡아줘야 했는데, 나까지 흔들리고 말았다"며 자책했다.
이날 한국의 가장 잦았던 패턴은, 좌우 침투 후 긴 롱패스를 통한 문전 볼 배급이었다. 후반 들어서는 키가 큰 김신욱을 투입하면서 이 같은 패턴을 고착화시켰다. 이는 한국축구의 전통적인 스타일이지만, 조광래 감독이 본래 추구하는 전술이 아니다.
일본 대표팀의 압박에 패스가 번번히 차단됐고, 기존의 전술이 막히자 예전 한국축구의 습관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패스가 번번히 막히는 상황에서 문전에 직접 연결하는 방식으로 밖에는 문전에 볼을 배급할 수 없었던 상황적 측면도 있다.
이는 지난 2010/2011 시즌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바로셀로나 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경기에서도 나타났던 현상이었다. 바로셀로나의 효율적이고 강한 압박에 번번이 차단당한 맨유는 롱패스로 일관했다. 이 당시 맨유도 바로셀로나의 패스워크와 압박에 압도당하며 크게 고전했다. 이 당시 스코어는 3대 1. 루니의 원맨쇼로 1골을 기록했지만, 이도 없었다면 맨유도 여지없이 3-0패배를 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맨유-바로셀로나 전에서의 맨유와는 달리, 한일전에서 보여준 한국팀의 '측면 크로스를 통한 문전 볼 배급' 전술은, 예정된 전술이 아니었다. 세밀하고도 약속된 플레이가 나올만한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본연의 플레이를 펼치지 못하는 한국 선수들은 우왕자왕했다.
조광래 감독이 추구하는 세밀한 패스 플레이는 온 데 간 데 없었다. '조광래식 축구의 행방불명'이었다. 조광래 감독이 구현한 이 '만화'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달리 새드엔딩이라는 점은 매우 아쉽다.
▶ 월드컵 예선 앞두고 완성되어 가는 일본 축구
일본은 이번 경기에서 수확이 컸다.
나가토모의 공백을 고마노가 확실히 메워줬다는 점, 가가와의 자신감 회복, 그리고 신예 기요타케의 재발견 등이었다.
나가토모 유토는 일본 수비수의 핵심으로, 현재 인터밀란에서 주전급 선수로 활약하고 있다. 그런데, 지난달 31일, 셀틱과의 경기에서 부상을 당해 이번 한일전에 불참하게 됐다. 공백의 여파가 우려됐지만, 서른살의 경험 풍부한 수비수 고마노 유이치가 그의 공백을 완벽히 메우는 데 성공했다. 두번째 골은 그의 돌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나 다름 없었다.
또한, 지금까지 부진했던 가가와가 완전히 자신감을 회복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가가와 선수는 소속팀 도르트문트(독일)에서는 맹활약을 펼치면서도 대표팀 경기에서는 별다른 활약을 펼치지 못했다. 2010년에 있었던 3번의 한일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 같은 부진을 말끔히 씻어내고 이번 한일전에서 순도 100%의 활약을 보여주며 일본의 에이스를 상징하는 등번호 10번을 괜히 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냈다.
가가와의 활약을 지켜본 TV중계 해설자도 "지금까지 일본 대표팀에서 부진했던 가가와, 자신감 많이 붙었어요. 엄청난 자신감입니다"라며 그의 부진 탈출을 환영했다.
신예 기요타케 히로시의 활약도 대단했다.
세레소 오사카에 소속된, 22세의 어린 선수로 대표팀에 첫 발탁된 그는 이날 경기에서 무려 2도움을 기록했다. J리그에서 항상 꾸준한 활약을 보이고 있다며 자케로니 감독이 발탁한 그는 A매치 데뷔전에서 눈을 의심케하는 멋진 활약을 보여줬다. 특히, 마지막 세번째 골에서 보여준 가가와 선수와의 호흡은 많은 일본 축구팬들을 열광케 했다.
자케로니 감독 또한 일본 축구협회에게 전적인 신임을 받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일본 대표팀은 자케로니 감독 아래서 점점 시스템을 확고히 하고 있다. 2010년부터 일본 대표팀은 기존의 주축 선수들을 기반으로 전술적인 부분을 보완해 나가며 기요타케 선수 등 새 전력을 추가하며 팀을 정비해나가고 있다.
장래 전망도 밝다. 선수들의 호흡 또한 날이 갈수록 좋아지고 있다. 주축 선수들도 현재 분데스리가 등 주요 리그에서 대부분 선발로 뛰고 있는 만큼, 이대로 경험과 선수간의 호흡이 쌓인다면 일본 대표팀은 유럽의 강호 못지 않은 전력을 구축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비해, 한국은 산 넘어 산이다.
조광래 호 출범 이후 단점으로 지적받고 있는 수비진 불안 문제 해소와 이영표, 박지성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대책 마련, 그리고 얕은 선수층을 보완하기 위한 선수 발굴, 전술적 요소의 보완 등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산더미다.
단, 이번 경기를 통해 반성할 계기를 얻었고, 정신적으로 무장할 기회를 얻었다. 박주영, 기성용 등 주축 선수들도 "이번에 반성하는 기회, 재기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경기력의 바닥을 찍었으니, 앞으로 올라설 일만 남았다. 이번 경기를 재기의 발판으로 삼아, 9월 2일 레바논 전부터 시작되는 월드컵 예선 3차 경기에서는 한국 대표팀 본연의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
이지호 기자
마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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