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마이데일리 = 고동현 기자] 그야말로 아이러니다.
한 때 호타준족의 상징이었던 박재홍이지만 그도 세월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박재홍은 시즌 종료 후 소속팀인 SK 와이번스로부터 현역 은퇴 뒤 해외 코치 연수를 제안 받았다.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SK를 떠나 다른 팀으로 옮길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됐다. 심사숙고 끝에 그가 내린 결정은 선수 생활 연장이었다.
▲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박재홍, 김성근 감독 앞에서 시련을 만나다
박재홍은 그야말로 '야구 엘리트'의 전형적인 코스를 밟아왔다. 청소년 대표를 시작으로 아마추어 국가대표에 이어 프로에서도 여러차례 태극마크를 달았다. 1996년 현대에서 데뷔한 후 그 해 프로야구 역사상 처음으로 30(홈런)-30(도루)를 달성하기도 했다.
때문에 그는 누구보다도 자신의 실력에 자부심을 갖고 있으며 자존심 역시 강하다.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그에게 2007년은 결코 잊을 수 없는 한 해다. 박재홍은 토털 베이스볼을 추구하는 김성근 감독 밑에서 붙박이 주전으로 뛸 수 없었다. 자신보다 훨씬 어린 김강민, 박재상, 조동화와 치열한 경쟁을 펼치며 한 경기라도 더 뛰기 위해 노력했다. 2007년 한국시리즈에서 팀이 우승한 이후 박재홍이 김성근 감독에게 울면서 샴페인을 붓는 모습은 2007년 박재홍의 심경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이후에도 박재홍의 입지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공격보다는 수비를 더욱 중요시하는 김성근 감독의 스타일상 외야수로 나가는 일이 점차 줄어들었다. 박재홍은 이를 이겨내기 위해 젊은 선수들보다 더욱 많은 훈련을 소화했지만 세월의 흐름을 완벽히 막을 수 없었다.
▲ 김성근 감독이 떠났다, 박재홍도 떠난다
이는 올시즌 역시 마찬가지였다. 예전 박재홍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2군을 여러차례 들락날락했다. 1군에 있더라도 그라운드보다는 벤치를 지키는 날이 많았다. 여기에 김성근 감독의 귀에 그가 품은 불만이 들어가며 문책성 2군을 경험하기도 했다.
때문에 많은 이들은 김성근 감독이 자진 사퇴 후 경질 당하는 과정에서 박재홍에게는 실보다는 득이 많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박재홍은 팀이 준플레이오프, 플레이오프, 한국시리즈를 치르며 모두 엔트리에 합류하지 못했다.
박재홍과 김성근 감독은 쉽게 말해 애증의 관계였지만 김 감독이 계속 있었다면 박재홍이 은퇴 권고를 받았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 김 감독이 젊은 선수를 키우는 것에 누구보다 역량을 쏟아붓기는 하지만 이에 못지 않게 노장 선수들을 중용하기 때문이다.
다른 팀에서 방출당한 베테랑 선수를 누구보다 많이 데려온 것도 김 감독이었으며 안경현, 가득염 등 노장선수들이 은퇴 의사를 밝혔을 때도 여러차례 만류한 바 있다. 때문에 김 감독이 그대로 있었다면 박재홍은 여느 때처럼 팀 전력 구성에 들어갔을 확률이 높다. 김성근 감독은 시즌 초반에 박재홍이 벤치에 있는 이유를 두고 "박재홍을 선발로 내보내면 대타로 낼 타자가 없다"고 말하며 믿음을 드러내기도 했다.
구단과 김성근 감독이 재계약을 놓고 갈등한 부분 중에는 팀의 미래에 대한 부분도 있었다. 구단에서는 점차 리빌딩을 추구하고자 했지만 김 감독의 생각은 이와 차이가 있었다. 김 감독의 파워가 크게 작용했던 당시와 달리 지금은 구단쪽의 파워도 커졌고 결국 '노장' 박재홍은 '전력외 통보'를 받았다.
박재홍에게 인천은 남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프로에 데뷔한 것도, 최전성기를 누린 것도, 부활을 한 것도 모두 인천이었다. 하지만 박재홍은 선수 생활 연장을 위해 정들었던 인천을 떠날 확률이 높아졌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애증의 관계였던 김 감독의 빈자리가 있다.
[2007년 한국시리즈 우승 후 박재홍이 김성근 감독에게 울면서 샴페인을 붓는 모습(첫 번째 사진), 홈런을 친 뒤 박재홍이 기뻐하는 모습(두 번째 사진). 사진=SK 와이번스 제공, 마이데일리DB]
고동현 기자 kodori@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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