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김석민의 은좌극장]
눈보라를 맞으며 한라산 중턱을 걸어 내려와, 드문드문 번개처럼 스쳐지나가는 시외버스를 잡아타고, 또 그렇게 한동안 달려가야 겨우 서귀포 유일의 극장을 만날 수 있는 그 수고스러움이야 뭐, 다른 관객들과 대동소이한 문제이니 쿨-하게 넘긴다고 해도, 지금부터가 문제다. '서귀포 월드컵경기장'에는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이 있다. 한쪽은 극장입구를 향한 지하도로. 그리고 한쪽은 우아한 올레길. 극장이냐? 올레길이냐? .... 생각해보라. 장엄한 하늘과 바다. 보이는 곳곳마다 신화가 깃들어 있는, 여기는 제주도가 아니던가? 아.... 가슴 떨리는 데이트도 아니고... 수다 떨 동행도 없고... 컴컴한 극장에서 나 홀로 보낼 이번만큼은 영화가 책임져야한다. 정말로, 진짜로, 진짜로 재미있어야 한다. 쩝! 결국, 카메라는 배낭에 도로 집어넣고 '던전'입구처럼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지하입구를 거처 웅장한 월드컵경기장 바로 밑에 위치한 극장 매표소로 향한다. 그리고 스르릉- 어느새 필자는 칼을 뽑아들었다.
'재미없기만 해봐라.'
2. 맛깔난 보색대비, (단호한 어조로)그게 필요함돠.
오늘의 영화는 '부러진 화살'과 '페이스메이커'다. 결론부터 말하면, 한 작품은 재미있었고, 또 다른 작품은 재미없었다. 그 이유는 두~울~다. 배우 안성기 때문이다.
'부러진 화살'은 부당한 해고로 밥그릇을 빼앗긴 수학교수 김경호(안성기)가 교수지위 확인소송에서 패소하고 항소마저 억울하게 기각을 당하자, 석궁을 들고 담당판사를 집까지 찾아가 위협하는 아~주 찌질한 사건장면부터 시작한다. 다들 알다시피 이 영화는 실제사건의 실제 재판과정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피해자는 현재 버젓이 살아있고, 피고는 이미 실형 4년에 만기 출소한, 그래서 겉보기에 밋밋한(?) 이 실화가 왜 영화화까지 되었는지, 또 재밋거리는 무엇인지를, 우리의 주인공 피고 김경호(안성기)는 재판중임에도 불구하고 담당변호사를 덜컥, 일방적으로 해고하는 행동으로 보여준다. 순간, 멍~'아? 저 아저씨 또라이다.' 영화의 도입부부터 우리의 주인공은 왕따 당해 징징대는 일개 수학교수가 아니라, 깐깐한 원칙주의자로 돌변하고, 그와 동시에, 이 사건을 법치주의에 대한 도전이자 테러라고 규정하며 일사불란 똘똘 뭉친 근엄한 사법부는 찌질한 본색을 들켜버린, 가증스러운 집단으로 전락한다. 그렇게 분명한 어조로 갈 방향을 정한 이 영화, 초장부터 재미있다.
자- 그럼, 영화가 던져 줄 이야기의 재미가 '위신이 깎일 위험에 처한 절대 권력과 원칙으로 무장한 일개 왕따의 싸움'이라면 그 재미의 중심은 캐릭터임이 분명하니 그걸 즐기면 되는 것이다. 진실공방은 극장 밖에서 따지고, 극장 안에서는 그 재미에 계속, 푸~욱 빠지면 되는 것이다.
깐깐한 원칙주의자인 김경호(안성기)의 캐릭터성은 또 다른 주인공인 자칭 '철학이 있는 양아치 변호사' 박준(박원상)을 만나면서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가 되는데, 둘 관계가 정말로 흥미롭다. '법은 더럽다'는 '꼴통좌빨' 박준을 향해 '법은 아름답다! 안 지켜서 그렇지.' 호통치는 순간, 김경호(안성기)는 깐깐한 원칙주의자에서 합리적인 보수로 돋보이고, 그렇게 업그레이드 된 김경호 덕분에 박준 역시, 이리저리 툴툴대지만, 결국 유연한 융통성을 보이며, 실용적이고 원칙적인 좌빨로 거듭나게 된다. 상생의 구도를 잡은 두 주인공만으로도 갈등의 굴곡을 펼치며, 하나의 줄거리를 이어 갈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선명한 캐릭터 차별성이 큰 부분을 차지하지만, 그들이 함께 손을 잡고 맞서 싸우고 있는 적, 사법부 캐릭터들의 막강한 존재감도 크게 일조를 한다.
음~아주 오랜만에 주인공을 비롯한 모든 배우들의 향기가 극장을 가득 채우며 관객 가슴 깊이 파고드는 작품을 만났다. 그럼 이제, 재미있고 기쁜 마음을 유지한 채, 다음 영화 '페이스메이커'를 만나기 위해 1관으로 자리를 옮겨보자.
영화 '페이스메이커'는 마라톤 선수 생활을 접은 주만호(김명민)가 비록 비루하지만 씩씩하게 생활하는 장면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현역시절, 우승후보인 동료의 페이스조절을 위해 자신의 페이스는 팽개쳐야했던 페이스메이커 주만호는 '자기희생'이 주특기인 양, 하나 밖에 없는 동생의 행복이 늘 최우선이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그런 형의 진심을 동생 놈은 번번이 싸늘하게 무시를 한다. 동화책에서나 나올법한 아주 건강하고 바람직한 도입부는 그렇게 재미없게 흘러가다,
드디어 재미있는 변화를 맞이하게 되는데, 주만호 앞에 마라톤 국가대표감독으로 다시 나타난 박성일 감독(안성기)때문이다. '아-안성기님, 방가방가. 부러진 화살 잘 봤어요.' 그러나 웬일이야? 이 영화의 배우 안성기는 아주 불친절하게도 표정이 없다. 그냥 배경으로 물러서있을 작정인가? 여기서부터 캐릭터는 헷갈리기 시작하고, 이야기는 재미있을 수도 있었던 아까운 장면들을 나열한 채, 하나의 감동만을 향해 김명민만 마라톤처럼 그저 죽어라 달린다. 그리고 끝.
이유는 간단하다. 배우 안성기가 배우 김명민을 위해 악역을 맡으며 '페이스메이커'역할을 안했기 때문이다. 관객들은 주인공과 함께 노려 볼 악당이 필요하다. 천하의 김명민이 힘겹게 대적할 악당이 이 영화 안에서 안성기 말고 또 누가 있겠는가? 주만호가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버리고 자신만을 위한 완주를 못하는 본질은 고질적인 부상도 아니고, 그렇다고 동생은 더더구나 아니니 결국 자기자신 아닌가. 이 영화는 인간승리 스포츠드라마다. 마지막 올림픽에서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늘 그렇듯이, 쓸쓸하게 스스로를 아웃시킬 그 순간, 어찌 됐든 동생의 빨간 우산으로 주만호는 완주를 위해 다시 뛰지만, 그래서 동기는 있지만, 그 선택 때문에 돌파해야 할 가장 큰 시련의 장벽은 보이질 않는다. 가장 좋아하는 달리기를 영원히 할 수 없다는 신체결함이던, 나약한 자기희생이던, 필요 이상의 책임감이던, 그것들이 형상화되어 여기까지 징그럽게 따라와 그 순간, 주만호 앞에. 그리고 관객 앞에 무시무시하게 버티고 서있어야 할 캐릭터가 필요했다. 그리고 산산이 부서지던, 득의양양하게 비웃던, 깔끔하게 주만호와 관객의 감정을 정리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역할을 해줘야 할 안성기는 그 자리에 없고 멀찍이 떨어져 멀뚱멀뚱 서있었으니.... 그래서 마지막에 펼쳐 든 동생의 빨간 우산은 감동만 있고, 통쾌한 재미가 없는 것이다.
배우 안성기는 각성해야 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고유한 오리지널을 지닌 이 믿음직한 배우를 제대로 활용해야했다. 이 영화의 관계자 중 누군가가, 페이스메이커'의 시나리오를 처음 보았을 때, 박성일(안성기) 캐릭터가 지루했다고 고백하지 않았던가. 저간의 사정이야 있었겠지만, 적어도 더 재미있는 영화가 될 수도 있었던 기회는 있었다는 것이니, 참 아쉬운 대목이다.
어차피 그 어두컴컴한 극장 안으로 기어들어가 울고 웃고 스트레스를 받기로 자청한 건 관객인 필자이니, 각성하라느니 말라니 떠드는 건 주제파악 못한 짓이지만, 오늘, 배우들의 훌륭한 열연이 돋보였던 두 영화 덕분에 너무 기뻤던 탓에 애교를 섞어 칭얼거린 것으로 슬쩍 뭉개며, 끝으로 오늘, 뛰어난 배우들의 뛰어난 재능들이 모두 함께 상생하며 어우러져 발휘되는 놀라운 순간의 느낌을 사전적으로 풀면서 쓸데없이 길어진 글을 후다닥 접는다.
보색 대비 [補色對比]:
[미술]
보색 관계의 두 색을 같이 놓을 때 서로의 영향으로 각각의 색이 더 뚜렷하게 보이는 현상.
빨강과 녹색, 노랑과 파랑, 녹색과 보라 등이 보색이며, 이들의 어울림을 보색 대비라 한다.
김석민은 독립영화 감독으로 현재 제주도에 정착해 제주유리박물관에서 근무하면서 틈틈이 시나리오를 쓰고 단편영화를 준비하며 공력을 쌓는 중이다. dolmean@hotmail.com
[사진='부러진 화살' 속 안성기와 '페이스메이커' 속 안성기]
배선영 기자 sypova@mydaily.co.kr
- ⓒ마이데일리(www.mydaily.co.kr).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
댓글
[ 300자 이내 / 현재: 0자 ]
현재 총 0개의 댓글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