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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데일리 = 이준형 기자]잘 못 보던, 그래서 감당이 안 되는 드라마가 오랜만에 나왔다. 암환자 퇴직자 서인석(창수 역)은 왜 공항 안 가고 여행가방 끌고 거리를 떠돌까. 안재모(수철 역)는 형사 그만 두고 택시기사하며 과연 잘 살수 있을까. 상대방 카운터 펀치를 맞고 사경을 헤매는 복서 황세정(무명 역)은 교통사고로 꽉 막힌 앰불런스 안에서 과연 살까.
2일 밤 방송된 KBS 공사창립특집 TV문학관인 '강산무진'(연출 김홍종, 극본 이인)은 매우 어려운 드라마다. 드라마는 소설가 김훈의 단편 '강산무진' '고향의 그림자' '머나먼 속세', 이 세 작품을 원작으로 했다. 90년대 '길위의 날들' '밤주막'으로 영상미학가로 알려진 김홍종 PD는 전혀 다른 주인공의 세 에피소드를 퀼트식으로 엮었다. 퇴직 암환자 서인석과 형사 안재모, 그리고 복서가 된 청년스님 황세정 등 세 주인공은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지만, 감독은 이 세 주인공의 궤적을 한 작품 안에서 끊임없이 교차시켰다.
하지만 (원작을 안 읽은 시청자라면) 드라마는 주인공을 따라가려다 보면 대충을 알겠으면서도 '왜'란 의문이 곳곳에 남는다. 왜 시한부 암 걸려 퇴직금 타고 아파트 팔고, 전처에게 위자료 남은것 주고 신변정리 다했으면서도 주인공 서인석은 아들 있는 미국행 비행기를 안 탈까. 형사 수철은 범인의 무당어머니에게서 치매 걸린 생모가 느껴져서만 범인을 놔줬을까. 그리고서 형사를 그만 둘걸까. 황세정은 바닷가서 광고 찍는 여자 모델에 동해 속세가 그리워졌고, 갑자기 떠나고파 절간의 수배범을 신고한 걸까.
그리고 마지막 엔딩의 원경속 갈대밭 낚시꾼 두명이 누구일까를 곰곰 생각하다 그 의문이 풀렸다. 그 낚시꾼이 누구인지는 알 필요가 없었다. 서인석이 여행캐리어를 끌고 다시 뒷비행기를 탈지, 아니면 거리로 뛰어들어 자살할지도 중요하지 않다. 택시기사로 전직한 전직 형사 수철도 걱정하는 아내 자식과 잘 살기를 바라면 된다. 범인을 은닉해준 스님을 배신한 무명은 앰불런스 안에서 죽어 벌을 받아도 좋고 살아 개과천선해도 좋다.
그래서 드라마는 길거리 서인석, 택시안 안재모, 앰불런스안 황세정의 스톱커트로 그 결말을 보여주지 않는다.
딴은 김홍종 감독이 "이 드라마에서 인물은 별로 중요하지가 않다"고 했다. "스토리는 잠재돼 있고, 배경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드라마의 대표제목 '강산무진(江山無盡)'의 아득한 어감처럼 세상은 창수 수철 무명과는 상관없이 끝없이 흘러간다.
드라마에는 터널과 기차 건널목이 많이 등장한다. 기다리는 건널목은 주인공들의 갈등이다. 암 선고받은 서인석은 "암 걸린 사실을 가족 말고는 다른데 알리지 말라.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는 의사의 냉혹하고도 현실적인 권고를 받는다. 또 아무것도 모르고 밝기만 한 딸에게 '암에 걸린 사실'을 말할까 말까 고민하다 얘기하고 만다. 안재모는 범인의 무당어머니를 만난 후 요양원 찾아 치매 걸린 생모에 귤을 까주며 직업과 인생을 고민했다. 무명은 링위에 복싱시합을 하다 잠깐 눈에 스친 링밖의 난각 스님(안치옥 분) 때문에 순간 갈등하다 굉음같은 펀치를 얻어맞는다.
조각같은 단편 영상이 영화적인 리듬으로 연결되는 드라마에서는 냉철하면서도 절절한 장면이 넘친다. 음울한 첼로 선율속에서 의사의 암 선고를 받고나온 서인석은 끝없는 복도를 지나친다. 일견 지루해보이는 화면은 맞은편 여자환자가 절뚝거리고 오고 서인석이 복도 저끝 암흑으로 사라질 때까지 롱테이크로 보여준다. 유독 뒷모습이 많이 비춰지는 서인석은 아득한 죽음앞에서 멈칫거리다 그대로 받아들이고 걸어가는 것이다. 카메라는 그런 그에 꿈쩍도 안하고 지독하게, 정직하게 암환자를 들이댄다. 신변정리하고 조명하나 켜진 아파트 거실에 홀로 남은 서인석의 부감은 절대고독을 느끼게 한다.
안재모는 범인 잡기에 회의를 느끼고 요양원의 늙은 노모를 찾는다. 안재모는 봉지에서 귤을 꺼내 치매 걸린 노모앞에서 몇개씩이고 까 준다. 노모를 안타까워하는 마음도 같고, 전직에 갈등하는 것도 같고, 또 그냥 병문안 온 무의미한 관성과도 같다.
영화같은 드라마는 이 외에도 화보같은 영상이 속도감있게 펼쳐진다. 범인 찾아 부산 곳곳을 헤매는 안재모의 장면에서 비춰주는 산동네 전경, 섬 절 해망사에서 수련하는 난각스님, 빠르게 오고가는 뱀장어 등 같은 기차, 그리고 터널 등은 구상과 추상을 오가는 아름다운 미장센이다.
감독은 이야기 스토리텔링보다 그 배경이 더 중요하다 했으니, 드라마의 주인공은 부두 컨테이너, 피튀기는 링, 암 병동과 혼잡한 거리, 섬 절, 그리고 들치기 퍽치기 은행강도 같은 범죄 현장인 셈이다. 이 치열한 삶의 형상을 드라마 '강산무진'은 제목처럼 무정하게 담담하게 보여주었다. 그러나 아무리 드라이해도 우리는 극중 끝끝내 보여주는 인생의 소실점같은 터널을 통해 저 끝에 뭐가 나올지 내내 궁금해진다. 그건 갑자기 툭 끊어지는듯한 드라마 엔딩서 '이게 뭐지?'하고 암담해질지라도, 내내 부여잡고 싶은, 실낱같은 속물적 휴매니티인 것이다.
김홍종의 영상언어 이미지는 곧 터널이자 길이다. 그는 '길위의 날들'같은 많은 드라마에서 시간과 공간, 인생의 소실점같은 터널을 보여주면서도 그 끝을 보여주지 않았다. 옥상 위에서, 아니면 이층 창문을 통해 떨어져 보는듯한 무감한 화면을 통해 촌과 도시, 강 바다 등을 훑고 세상의 전경과 쓰레기통을 속속들이 비추며 감독은 오히려 우리에게 만감을 안겨준다.
지금 '해를 품은 달'같은 연속극 스토리텔링에 익숙해진 시청자에게는 어리둥절할 드라마, 하지만 이와는 전혀 다른 영화같은 영상문법의 드라마는 시청자 눈 씻겨줄 안약처럼 필요하고 최소한 매니아 상영관에서라도 보여줬으면 한다. 공영방송 KBS가 멈칫거리지 말고 부단히 돈 대고 제작해야 할 몫이다.
이은지 기자 ghdpssk@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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