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마이데일리 = 김진성 기자] 12일 잠실 LG-SK전. 3점 뒤진 LG가 9회말 2사 후 갑자기 투수 신동훈이 대타로 나와 타격 의지를 보이지 않은 채 삼진을 당하면서 경기가 끝났다. 김기태 감독이 경기를 포기한 이유는 알려진대로 SK 이만수 감독의 투수교체에 대한 불만이었다. 이 감독의 투수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는 게 중론. 하지만, 김 감독은 이 감독이 투수교체의 불문율을 어기면서 LG를 기만했다고 봤다.
▲ 불문율과 기만, 그 모호한 경계선
불문율. 사전적 의미는 문서의 형식을 갖추지 않은 법이다. 공식적으로 법은 아니지만, 암묵적 동의 하에 지키는 약속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이를 지키지 않으면 상대에 대한 기만 행위라 할 수 있다.
일례로 투수가 고의로 타자에게 몸에 맞는 공을 던지는 건 기만이다. 단, 그 전에 상대의 신경을 거슬리게 한 행위가 있었다면 빈볼도 어느 정도는 불문율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물론, 그 ‘어느정도’가 정말 어느 정도인지 경계가 모호하기에 논란이 된다. 이밖에 점수차가 크게 벌어진 경기 막판에 앞선 팀이 도루, 번트를 시도하는 행위 등도 상대에 대한 기만 행위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명확히 몇점 차까지가 불문율이고, 기만 행위인지에 대한 경계는 모호하다. 각 팀들은 이런 모호한 상황의 해석을 두고 신경전을 벌이다 감정싸움으로 번지는 경우가 있다.
▲ 투수교체는 어디까지가 불문율인가
감독들에게 가장 어려운 것이 무엇이냐고 질문하면 십중팔구 “투수교체”라고 한다. 야구의 매커니즘은 결과론이다. 모든 작전은 결과에 따라 성공과 실패로 갈린다. 결과를 알기 전엔 작전이 성공할지 실패할지 알 수 없다는 게 언제나 감독들을 골치 아프게 한다. 더구나 투수교체는 감독이 경기에 개입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작전이기 때문에 가장 힘든 법이다.
이런 투수교체의 특성은 야구의 불문율과 경계의 모호성을 더욱 가중시킨다. 결과를 알 수 없으니 교체를 하는 입장에선 최선의 플레이라고 생각하고 던지는 승부수임에도, 상대팀으로선 결과를 알기 전에 최선의 플레이가 아닌 상대를 기만하는 행위라고 주관적으로 해석할 수가 있다.
예를 들어 점수 차가 많이 벌어졌을 경우에 투수 교체를 자주하는 건 기만행위가 맞다. 점수 차가 많이 벌어졌다는 기준은 여전히 모호하지만, 현장에서 경기를 지휘하는 감독 입장에선 어느 순간에 “아, 오늘 승부가 갈렸다, 아직 박빙이다”라는 감이 오기 마련이다. 이기든 지든, 승부처가 어디인지를 안다는 것이다. 즉, 승부처를 지배한 팀이 계속 리드를 지키고, 또 추가점수까지 뽑은 상황에서 투수를 계속 바꾼다면 그건 어떤 식으로든 상대가 ‘응징’하게 된다. 그 응징의 방법 중 가장 대중화된 것이 바로 빈볼이다.
▲ 잦은 투수교체, 이제는 불문율로 인정된다
5~6년 전 일이다. 고양 원더스 김성근 감독이 SK를 맡던 초창기 시절 그는 ‘벌떼야구’로 유명했다. 매 경기, 매 순간 데이터와 감각을 혼용해 잘게 잘게 투수를 교체했다. 때론 점수가 벌어졌다 싶을 때도 투수를 교체하는 걸 서슴지 않았고, 1~2타자를 상대하고 투수를 교체하는 일이 빈번했다.
당시만 해도 불펜 위주의 마운드 운용이 막 자리를 잡던 시점이다. 2005~2006년 당시 선동열 감독이 이끄는 삼성이 불펜의 지키는 야구를 앞세워 리그를 석권하면서 불펜의 중요성이 부각됐고, 2007년 김 감독이 SK에 부임하면서 불펜 중심의 야구에 좀 더 세밀함과 깊이가 더해졌다. 물론 목적은 단 하나, 승리였다. 승리의 확률을 높이기 위해 세밀한 투수교체를 했다. 처음엔 이런 김 감독의 투수교체에 일부 팀이 승리에 대한 집착이라며 반발하기도 했고 기분도 나빠했다. 박빙승부도 아닌데 자꾸 경기를 지연시킨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대부분 팀에 불펜의 중요성이 강화됐다. 경기 후반 1~2점 박빙이 아닌 그 이상의 점수차가 나더라도 자주 투수를 바꾸고 원포인트 릴리프를 기용하는 건 일반화가 됐다. 3~4점 앞선 팀이 추가득점 찬스에서 희생번트를 대는 것도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사실 김 감독이 SK를 이끌던 막판엔 투수교체 횟수가 오히려 다른 팀보다 더 적었다. 팀간 전력 차가 줄었고, 경기 후반에 승부가 뒤집히는 경우가 빈번해지면서 이런 경향은 어느새 새로운 불문율이 됐다. 그 정도의 승리집착이 일종의 ‘프로페셔널’로 인정받는 것이다.
▲ 근본적인 야구관의 차이, 내부사정은 여전한 한계
그런데 투수교체의 시점과 박빙승부의 정도, 매치업의 해석 등은 여전히 불문율과 기만의 모호한 경계선으로 남아있다. 그건 감독들의 근본적인 야구관에서 오는 차이, 그리고 각 팀이 처한 내부적인 상황에 연관돼 있는 경우가 많기에 어쩔 수 없이 상대 팀이 오해를 하는 경우가 생긴다.
LG 김기태 감독은 9회말 1사 후 좌타자 이진영을 상대로 이전까지 공 11개만을 던진 좌완 셋업맨 박희수의 강판과 우완 이재영의 등판을 언짢아했다. 김 감독이 보기엔 박희수가 경기를 충분히 마무리 할 수 있는 상황에서 좌타자에 우투수를 넣는 행위에 분노했다. 하지만, 김 감독은 박희수와 정우람이 공을 많이 던질 수 없다는 SK의 내부적인 사정은 몰랐다. 사실 감독이 상대 팀의 자세한 선수 사정까지 알 수는 없을 수도 있기에 불문율과 기만의 경계가 굳어지는 데 한계가 있다. 그런 점에서 투수교체가 주는 불문율과 기만의 모호함은 영원히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
어쨌든 김 감독 입장에선 SK 이만수 감독의 투수 기용이 본인의 야구관과 어긋나는 행위로 비춰지면서 투수를 대타로 기용해 경기를 포기했다. 이 응징은 결과적으로 자충수가 됐다. 이번 케이스는 김 감독이 오버액션, 나아가 프로페셔널하지 못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결국 누구나 불문율과 기만의 경계선을 주관적으로 해석하기 나름이지만, 누가 봐도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논란거리가 되더라도 그 단계까지 가선 안 된다.
[투수교체 장면들. 사진 = 마이데일리 사진 DB]
김진성 기자 kkomag@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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