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종합
[마이데일리 = 김진성 기자] 안타까운 수준을 넘어서서 부끄럽다.
김연아는 피겨스케이팅 여자 싱글 은메달이 확정되자 소치 아이스버그 스케이팅 팰리스를 꽉 채운 관중들에게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이건 쿨한 정도가 아니라 대인배였다. 국내, 외 언론들은 피겨여왕이 석연찮은 판정을 받고도 여왕다운 품격을 보였다며 극찬했다.
아니었다. 백스테이지에선 ‘피겨여왕’이 아닌 ‘24세 소녀’ 김연아였다. 어쩌면 그게 참 모습이었다. 외신들이 그 장면을 잡았다. 김연아가 우는 모습을. 이 장면을 접한 한국 국민들은 가슴이 미어졌다. 김연아의 금메달을 지켜주지 못해서가 아니다. 한국 스포츠 외교력의 어두운 단면을 24세 소녀 홀로 감당하게 해서다.
▲ 어른들은 김연아를 지켜주지 못했다
김연아는 경기 직후 방송인터뷰를 통해 “최선을 다했다. 결과에 신경 쓰지 않았다. (은메달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라고 했다. 솔직해지자. 김연아의 이 코멘트는 말 그대로 ‘방송용’이었다. 설령 진심이라고 치자. 그 진심이 순도 100%였을까. 김연아에게 소치올림픽 프리스케이팅은 19년 현역생활을 마치는 무대였다. 마지막 무대를 이렇게 찝찝하게 끝내고 싶은 스포츠선수가 몇이나 될까.
어른들이 재빨리 나섰어야 했다. 24세 소녀가 올림픽이라는 큰 무대에서 전 세계인들에게 벅찬 감동을 선사했다. 그러나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최소한 곁에서 김연아를 지켜본 어른들은 자식 같은 김연아를 지켜줬어야 했다. 하지만, 대한빙상연맹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다가 만 하루가 지나자 뒤늦게 ISU에 판정 확인을 요청했다. 대한빙상연맹과 대한체육회가 만 하루동안 왜 침묵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이런 판정 논란은 초동 대처가 생명이다. 물론 다 안다. IOC가 아니라 CAS(스포츠중재재판소)까지 사건을 몰고 가더라도 기각될 것이라는 점을. CAS서 심판 판정은 제소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대한빙상연맹이 곧바로 대한체육회를 통해 ISU(국제빙상연맹)에 항의를 하거나 판정 불복 조차를 밟았다면, 자연스럽게 IOC 혹은 CAS에 목소리를 높일 기회도 재빨리 마련되지 않았을까. 악화된 여론에 대한체육회는 IOC에 뒤늦게 항의 서한을 전했다. 뒤늦은 수습이었다. 어른들은 빙판에서 떠나는 피겨여왕의 상처를 어루만져주지 못했다.
▲ 또 드러난 아쉬운 한국 스포츠 외교력
한국은 소치올림픽서 톱10 진입이 여전히 가물가물하다. 그런데 올림픽서 한번 톱10 진입에 실패한다고 해서 한국의 우월한 스포츠 DNA 자체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한국은 여전히 전통적인 동, 하계 스포츠강국이다. 이건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점이다. 안타까운 건 선수들의 경기력에 비해 선수들을 뒷받침할 수 있는 외교력이 너무나도 부족하다는 점이다.
소치올림픽 피겨스케이팅 심판들은 대부분 유럽인으로 구성됐다. 특히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심판들은 모두 홈팀 러시아인으로 구성됐다. 사실 이들이 실제로 판정 논란을 일으켰다는 구체적이고 확실한 증거는 없다. 정황만 있을 뿐이다. 심판진 내부에서 ‘양심선언’이 나오지 않는 한 이번 사태도 그대로 무마될 가능성이 크다.
이런 논란을 막기 위해선 근본적으로 한국이 스포츠계에서 전 세계적으로 목소리를 높일 수 있고 영향력이 높은 국제적인 스포츠 행정가를 전문적으로 키워야 한다. 그러나 김운용 전 IOC 부위원장 이후 한국은 이렇다 할 영향력 있는 스포츠 행정가를 양성하지 못했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IOC 위원이긴 하지만, 이 회장은 경제인이지 스포츠 전문 행정인은 아니다. 스포츠 쪽에서 항상 중심을 잡는 데는 한계가 있다.
단순히 피겨스케이팅 한 종목에서 국제적인 심판을 많이 양성해서 올림픽에 보내 유럽 심판들을 견제하면 되는 게 아니다. 종목을 가리지 않고 전 종목에서 권위 있는 심판, 권위 있는 행정가가 배출돼야 한다. 그리고 이들이 국제적으로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파워를 키워야 한다. 그래야 이런 사태가 다시 발생하지 않는다. 한국은 엘리트 선수를 육성하는 데는 탁월한 재주가 있다. 하지만, 스포츠 전문 행정가를 양성하는 데는 아직 걸음마 단계다.
2002년 김동성, 2004년 양태영, 2012년 신아람 2014년 김연아까지. 이들에겐 공통점이 두 가지 있다. 동, 하계 올림픽에서 한국 스포츠를 빛낸 영웅들이다. 그리고 한국의 부끄러운 스포츠 외교력의 희생양이기도 하다. 영웅이면서 희생양이라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김연아. 사진 = 소치(러시아) 유진형 기자 zolong@mydaily.co.kr]
김진성 기자 kkomag@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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