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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데일리 = 허설희 기자] 뮤지컬 '글루미데이' 속 사내는 의문 투성이다. 실존 인물 김우진, 윤심덕과 달리 허구의 인물인 만큼 그에게는 물음표가 가득하다. 인간인지, 상상의 인물인지도 명확하지 않으며 그의 정체는 끝까지 관객들 상상에 따라 정해진다. 그래서 더 매력있고, 그래서 더 깊이 파고들 수 있다.
뮤지컬 '글루미데이'는 1926년 8월4일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상을반영한 작품을 쓰는 선구적 극작가이자 연극운동가인 김우진과 소프라노 가수 윤심덕의 동반투신 실화에 '사내'라는 의문의 인물을 더해 재구성한 작품. 이 사건은 당시 오랫동안 회자된 최고의 스캔들이었으며 이후 1991년 이들의 이야기가 윤심덕의 마지막 노래인 '사의 찬미'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글루미데이'에서 사내 역을 맡은 이규형은 최근 마이데일리와의 인터뷰에서 초연에 이어 재연에 출연하게 된 '글루미데이'에 대한 솔직한 생각을 털어놨다. 초연 당시 생각지도 못했던 뜨거운 반응에 놀랐다는 이규형은 '글루미데이'를 통해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 만족한 모습이었다.
▲ "금지된 사랑, 사내의 로맨스"
사실 지난해 여름 공연된 '글루미데이'는 워크샵으로 공연을 올리려 했던 것이 점점 일이 커져 무대, 의상도 더 신경 쓰게 됐고 공연 기간도 길어졌다. 하지만 다른 공연에 비해 다소 짧았던 것이 사실. 뜨거운 반응 만큼이나 재연을 원하는 관객들도 많았다. 짧은 연습 기간으로 인해 배우들도 어려움을 느꼈지만 어쨌든 결과는 좋았다. 이에 재연은 더욱 탄탄해져 돌아왔고, 배우들 역시 매회 무대 위에서 열연하고 있다.
이규형은 "반응이 좋았던 것은 운이 좋았던 거라 생각한다. 호평도 있었고 비판도 있었다. 중요한건 호평이든 비판이든 둘 다 관심이다. 너무 재미있게 했는데 기간이 짧아서 아쉬운 것도 있었다. 그때 다들 다음 시즌 또 올리면 다같이 하기로 했었다"며 "(윤)희석이 형은 드라마 스케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못하게 돼서 아쉬운 점도 있지만 다른 배우들은 다 다시 하게 됐고 새로운 배우들이 생겼으니 또 어떤 시너지가 날까, 어떤 색깔들이 나올까 궁금했다"고 밝혔다.
"초연을 올리기 전 받은 대본은 지금과 좀 다르긴 했지만 흡입력이 있었다. 어느샌가 끝장을 보고 있더라. '오! 재미있다, 슬프다' 이런 느낌은 아니었는데 흡입력이 있다는 것 자체가 매력이 있었다. 대본이 어려운 경우도 있는데 '글루미데이'는 그렇지 않았다. 물론 시간의 흐름과 순서 등이 머릿속에 한번에 정리 되지는 않았지만 ? 끌어오는 힘이 있더라. 아마 관객들도 흡입력 때문에 좋아해주시는 것 같다."
이규형이 연기하는 사내는 초연과 비교해 캐릭터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지만 윤심덕에 대한 생각은 바뀌었다. 사내가 심덕에 대해 느끼는 생각이 바뀌자 신도 바뀌었다. 정해진 톱니바퀴가 어긋나자 이규형은 혼란스러웠다. 초연 때 자신이 만들어 놓은 정당성이 새로운 장면으로 인해 맞지 않는 느낌이 든 것. 하지만 이는 성종완 연출의 설명으로 단번에 풀렸다.
이규형은 "대본상으론 문제가 없었는데 신이 해결이 안됐다. 그러다 첫공연 리허설 때 연출 형한테 '난 사실 해결이 안된다'며 물어봤다. 그러니까 '사내가 심덕을 진심으로 사랑한 것 같다'고 말해주더라"며 "그 말을 듣는 순간, 안풀렸던 신들이 모두 풀렸다. 첫공연 때 윤심덕 역 (곽)선영이가 딱 들어오는데 사랑하는 마음이 훅 생기더라. 거기다가 '찰나에 사는 인간'이라고 하는 순간, 사내의 심정이 느껴지고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지고 요동치기 시작하면서 신이 훅 해결되더라"고 설명했다.
"이 작품은 어떻게 보면 사내의 로맨스에 관한 이야기다. 처음엔 김우진과 심덕의 로맨스, 숨겨진 스릴러, 숨겨진 존재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이젠 금지된 사랑이 김우진과 윤심덕의 사랑이 아니라 사내와 심덕의 금지된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이 된 것이다. 금지된 낭만이 사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거라고 느껴졌다. 그 점이 제일 다른 점이다. 물론 보는 사람은 다른 걸 못 느낄 수도 있지만 연기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굉장히 다르다."
▲ "어렵고 힘드냐고? 더 재밌었다"
이규형은 사내 역을 맡으면서 다른 연기를 할 수 있어 사실 즐거웠다. 대학로 무대에 데뷔한 뒤 줄곧 가벼운 인물을 연기해왔기 때문에 무거운 역할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대학 시절 다양한 역할을 해왔지만 졸업 후에는 본의 아니게 한정적인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글루미데이' 속 사내는 달랐다. 격동하는 시대에 실존하지 않는, 누군가를 죽음으로 이끌면서 만족을 느끼는 인물을 연기하니 연습 때 어려워 했던 다른 동료들과는 달리 즐거움을 느꼈다.
"다른 역할이지만 비슷한 캐릭터를 연기해왔다. 그래서 사내 역을 연습하면서 더 즐거웠다. 초반에는 사내에게 다양성을 넣고 싶었는데 연출님이 원하는 색깔이 있었다. 초연 당시 분명한 색깔을 고수하면서 내가 원하는 다양성을 녹여 가기에는 시간적인 한계가 있어서 그러지 못했는데 재연 때는 최대한 녹여내려고 하고 있다. 스타일리쉬하고 엣지 있는, 산만하면 안되는 작품이기 때문에 사내 역시 잔동작보다는 한번 움직일 때 확 확 움직이고 멈출 땐 우뚝 선다."
이어 이규형은 사내 역에 대한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려줬다. 우선 관객들이 제일 궁금해 하는, 사내가 실존 인물인지 상상 속 인물인지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일단은 관객들에게 가능성을 열어뒀지만 기본적으로 사내는 초월적인 존재다"고 밝혔다.
그는 "하지만 연기할 때는 초월적인 존재라고 생각할수는 없고 똑같은 사람인데 싸이코패스적인 성향을 갖고 있고, 고통은 느끼되 죽지 않는 그 정도로 설정했다. 사내는 '나는 운명이다'고 생각한다. 운명은 추상적이다. 구체적인 디렉션이 있어야 배우가 편해지긴 하지만 사내는 운명이 의인화 된 인물"이라며 "하나의 똑같은 인간이지만 남들과 다른 점이 있다. 싸이코패스고 굉장히 똑똑하고 치밀한 인물이다. 총을 맞고 고통은 느끼되 죽진 않는다"고 말했다.
"난 재밌었다. 사실 뭘 맡아도 어렵고 안 힘들겠나. 근데 오히려 더 힘든건 항상 비슷한 역을 맡는 거다. 그게 더 재미 없다. 재미있으면 힘든 것도 안 힘든데 재미가 없어지는 순간 힘이 든다. 하지만 사내는 이전에 연기하던 캐릭터와 달라 재밌었다. 사내를 깊이 파고들려면 사내 뿐만 아니라 김우진, 윤심덕도 알아야 한다. 책도 많이 읽고 조사도 많이 했다. 여러가지 사상들이 있었던 시대, 사건도 많고 생각할 거리가 많다. 김우진과 윤심덕을 꼬시려면 그들보다 더 많이 알고 매력적이어야 하지 않나. 치명적인 것을 의도하고 연기하지는 않지만 사내만의 고고하면서도 도도한 느낌을 살리려 했다. 다음 시즌을 하게 된다면 좀 더 다양하게 만들고싶다."
▲ "무대에서 해온 것들, 헛되지 않다"
그렇다면 죽음을 찬미하는 사내가 이규형에게 미친 영향은 없을까. 다행히 이규형은 일상 생활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했다. 캐릭터가 일상에 영향을 끼치기는 하지만 인생을 뒤흔들 정도는 아니라는 것. 적당히 분리시키고 충분히 흡수한다는 의미다. 때문에 더 객관적으로 사내를 바라볼 수도, 주관적으로 사내를 이해할 수도 있게 된다.
"지난 시즌에는 사내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전혀 안 들었는데 이번 시즌에는 심덕을 사랑하게 되면서 혼자 남게 되는 그런 것 때문에 안쓰럽다. 혼자 죽지도 못하지 않나. 죽지 못하기 때문에 죽음을 찬미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언젠가 죽기 때문에 삶을 찬미한다. 하지만 사내는 죽지 못하니까 죽음을 찬미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하게 해주려는 것이다. 근데 사람들은 그걸 몰라주고 도망가고 벗어나려고만 한다. 그래서 김우진, 윤심덕과도 대립하게 되는거고. 이럴 때 본의 아니게 특별한 여성에게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정을 느꼈으니 이게 뭔가 싶지 않겠나."
한편 현재 이규형은 영화 '나의 독재자'(감독 이해준) 촬영중이다. 앞서 영화 '관상'(감독 한재림)에 잠깐 얼굴을 비췄던 그는 대학 시절 영화 '김씨표류기'로 인연이 닿았던 이해준 감독의 영화에 출연하게 됐다. 설경구, 박해일, 윤제문, 류혜영 등이 출연하는 '나의 독재자'에서 이규형은 내로라 하는 선배들 사이에서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됐다.
이규형은 "대선배님들과 하게 돼서 떨리기도 하고 누를 끼치지 말았으면 한다. 하나 다행인건 모두 연극 배우 출신이라는 것이다. 다른 선배님들도 말씀 하시는데 모두 무대에 섰던 분들이라 쫀쫀함이 있다. 이렇게 캐스팅 하기도 쉽지 않다는 말씀을 하시더라. 촬영장이 무대라고 생각하고 카메라에 빨리 적응해서 잘 하고 싶다"고 털어놨다.
"무대에서 해온 것들이 헛되지 않다고 생각한다. 원래 내가 하고 싶었던 것도 하게 돼서 사실 좋고 영광이다. 연극, 뮤지컬 쪽에서도 끊이지 않고 작품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한 거다. 그러지 못해 되게 고민했던 적도 있다. 포기할까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는데 다행히 잘 됐다.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현재 하고 있는 '글루미데이'는 살자는 메시지를 던지는 것이다. 어떻게든 죽이려고 하는 역할을 부여 받아 거기에 최선을 다 하고 있지만 삶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
한편 이규형이 출연중인 뮤지컬 '글루미데이'는 오는 27일까지 서울 종로구 DCF대명문화공장 1관 비발디파크홀에서 공연된다.
[배우 이규형. 사진 = 네오 제공]허설희 기자 husullll@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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