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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데일리 = 이은지 기자] 여리디 여린 소년이 있었다. 납치당하듯이 살막으로 잡혀왔고, 하루하루가 죽을 고비였다. 어쩌면 죽음이 평안을 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겨냈고, 단단한 껍질을 만들었다. 속살은 여전히 여릴지라도, 살아야 했기에 단단한 갑옷을 입고 살아갔다. 그렇게 살수로 자라났다. 영화 '역린' 속 을수의 일생이다.
'역린'에서 을수는 어렸을 때부터 광백(조재현)의 비밀 살막에서 오직 암살만을 위해 길러졌다. 훗날 조선 최고의 살수로 자랐고, 한번 맡은 의뢰는 실수 없이 완벽하게 처리했다. 광백에게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고 싶었지만,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성공을 해도 살수 없는 임무를 마무리해야 했다. 바로 정조(현빈)를 암살하라는 것. 어쩌면 을수가 광백에게서 벗어나는 방법은 죽음뿐인지도 모른다.
어린 을수가 살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갑수(상책. 정재영)였다. 자신에게 '을수'라는 이름을 붙여줬고, 자신을 살리기 위해 내관이 돼 궁으로 들어갔다. 그것이 을수를 성인이 될 때까지 살 수 있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갑수에 대한 기억"과 "갑수가 지닌 강인함과 정신력은 동경의 대상"이었고, 그것은 을수가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였는지도 모른다.
이후 성인이 돼 살수가 된 을수는 월혜(정은채)를 만났고, 사랑을 느꼈다. 을수에게 월혜는 희망이었고 빛이었다. 정조 암살을 거부한다면 월혜까지 위험했기에, 광백에게 벗어나는 이유도 있었지만, 월혜를 지키기 위함도 있었다.
을수 역을 맡은 조정석은 "정조 암살은 을수에게 희망과도 같았다. 을수처럼 어두운 과거를 겪은 사람일수록 희망에 대한 간절함이 클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조 암살 후 죽음을 예상했지만, 그래도 한 가닥 희망을 놓지 못했을 것이다"고 말했다. 결국 을수에게 정조를 암살하는 것은 상황이 변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마지막 남은 희망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반듯하고 착한 이미지였던 조정석은 인간미라곤 찾아볼 수 없는 살수 역을 통해 모험을 감행했다. "이미지 변신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의 또 다른 이미지를 만들어낸 것만은 분명했다.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는 조정석의 말처럼, 을수는 한순간 젓가락으로 사람을 죽이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술 한 잔을 마실 수 있는 그런 인물이다.
영화 '건축학개론' 이후 조정석을 따라다녔던 수식어는 '납뜩이'였다. 캐릭터 자체가 강렬하기도 했지만, 뮤지컬에서 유명했던 조정석이라는 배우를 좀 더 대중적으로 알린 이유에서일 것이다. 이후 드라마와 스크린을 오가며 다양한 캐릭터를 맡아 왔지만, 여전히 "납뜩이 수식어에 대한 부담감은 없냐"는 질문을 받아야 했다. "납뜩이로 인해 사람들에게 날 알렸으니 부담이 아니라 고마운 일"이라는 것이 조정석의 한결같은 답변이었다.
납뜩이라는 캐릭터가 강렬했지만, 매 작품에서 조정석은 자신이 맡은 캐릭터를 100% 소화해 냈다. 이는 특유의 성실함일 수도 있고, 조정석이 캐릭터를 대하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그는 "부담감을 갖지 않으려고 한다. 부담감을 갖는다면 내가 지닌 능력치보다 훨씬 못할 것 같다. 그 역할에 충실하고 그 인물에 최선을 다 할 뿐이다"고 말했다.
을수는 악역 인 듯 악역 아닌 악역 같은 존재다. 냉정한 살수로 길러져서이지, 본성이 냉혈한은 아니라는 의미다. 지금까지의 이미지와 간극이 컸고, 거기서 비롯되는 이물감이 생길수도 있었다. "검버섯을 뿌리는 분장을 하고나니 처음에는 당혹스러웠다"면서도 "그게 을수가 살아왔던 삶이고, 인생, 을수의 역사가 보여진다고 생각하니 그런 것들(당혹감)이 사라졌다"고 했다. 대중들이 느끼는 이질감에 대한 부담은 없었다.
이와 함께 조정석에게 주어진 숙제는 바로 을수의 감정이었다. 을수는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인물이었지만, 을수의 속내를 조정석만큼은 이해를 하고 있어야 했다. 혼자만이 해결할 수 있는 내면연기가 필요했고, 드러내지 않음에도 관객들로 하여금 느낄 수 있게 만들어야 했다.
조정석이 설명하는 을수는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지만, 가장 취약한 점을 건드렸을 때 가장 많이 흔들리는 인물"이었다. 그런 간극을 많이 넓히려고 노력을 했다. 일상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그런 감정이었다.
정말이지 고된 촬영이었다. 조정석은 "존현각이 도대체 무엇 이길래 이렇게까지 들어가기가 힘드나"라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이는 존현각에 들어가기까지의 촬영의 고단함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존현각 입구에서 빗속 촬영만 한 달이 걸렸고, 추운 날씨 탓에 얼어붙은 몸을 녹이고 다시 촬영에 들어가기의 반복이었다. "모든 배우와 스태프들이 추위와 싸웠다"고 말할 정도였다.
정조 역을 맡은 현빈이 부러웠다. 캐릭터가 아니라, 존현각 안에서 비를 맞지 않고, 맞대결을 할 때조차도 비를 피해 안에 서 있을 수 있는 현빈이 부러웠다는 귀여운 투정이었다. 얼마나 추웠냐는 물음에 말없이 표정으로 모든 것을 말했다. "최선을 다 했을 뿐이다"는 한마디로 정리했다.
이재규 감독은 을수 역에 조정석을 캐스팅한 이유로 '소년감성'을 꼽았다. 을수는 여린 아이었고, 살기 위해 단단한 껍질을 입은 아이였다. 그 껍질이 깨졌을 때 여린 속살이 그대로 드러나야 했다. 조정석에게는 그런 소년감성이 있었다. 조정석 역시 "소년 감성이 있는 것 같다. 정확하게 어떤 것을 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개구진 모습도 있고, 여릴 때도 있다. 마음도 약하다. 그런 것을 통틀어 이야기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최근 조정석은 신민아와 호흡을 맞춘 영화 '나의 사랑 나의 신부' 촬영을 마쳤다. 이제 좀 쉴까 했지만, 뮤지컬 '블러드 브라더스' 공연 준비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행복한 나날이다. 친정, 고향에 돌아온 기분이다. 룰루랄라하면서 다니고 있다. 쉬고 싶다는 생각은 안한다."
한동안 조정석의 활약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을수가 가면 '블러드 브라더스'가 올 것이고, 하반기에는 '나의 사랑 나의 신부'가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다.
[배우 조정석, '역린' 스틸컷. 사진 =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이은지 기자 ghdpssk@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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