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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데일리 = 이승록 기자] 2009년 KBS 2TV 주말드라마 '수상한 삼형제' 촬영장을 가는 오지은의 손발이 덜덜 떨렸다. 감정신이 있는 날이다. '망치고 오면 어떡하지' 걱정이 태산이다. '안 그래도 하루가 멀다 하고 촬영장만 가면 혼나는데…'
사실 '수상한 삼형제' 여주인공 주어영 역에는 오지은 말고 최종 후보로 한 명의 여배우가 더 있었다. 진형욱 PD가 오지은을 추천했다. 문영남 작가는 다른 여배우가 마음에 들었다. 진 PD가 오지은을 밀어붙였다. 연기 경력 없는 풋내기 오지은이 문 작가의 성에 찰 리 없다.
오지은도 알고 있다. 대본 리딩 하는 날은 의자에 가시방석이라도 깔아놓은 것만 같다. '내가 작품에 피해를 주는 거면 안 되는데…' 부담만 커져간다. 문 작가 눈치까지 보느라 마음 졸이는 시간이다. 불호령이 떨어질까봐 조마조마하다.
주어영이 결혼하고 나면 좀 낫겠거니 했는데, 어림도 없다. 풋내기 배우의 초조한 속내는 알는지 문 작가는 주어영의 감정신을 거듭 늘렸다. 촬영장 가는 발걸음이 무겁다. '혼나면 안 되는데. 잘해야 되는데. 어떡하지. 보잘것없는 신인이 이런 역할을 해서 누가 된 걸까.' 걱정에 또 걱정이다.
그렇게 8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수상한 삼형제'는 최고 시청률 43.5%의 열풍을 기록하고 마무리됐다.
드라마가 끝나고 문 작가가 오지은을 불렀다. "널 의심하지 않아도 돼"라고 한다.
"네 나이 때 우리나라 여배우 중 네가 최고야. 넌 끝까지 연기해야 하는 배우고. 너한테 계속 그런 장면 준 건, 네가 잘해내니까 기대하면서 쓴 거야. 내가 이렇게 잘 출발시켰으니 앞으로 연기 생활하는 데 자부심 가져. 힘든 일 있더라도 널 믿어도 되니까. 끝까지 널 믿고 이 세계에서 살아남아. 혹시나 일이 안 온다고 해서 너 스스로 널 의심하지 말고."
문 작가의 말에 오지은을 고집했던 진 PD까지 눈물 났다. 오지은은 그 순간을 9년 연기 인생 중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꼽았다.
"절대 칭찬 안 해주시던 선생님이셨는데, 그렇게 말씀해주셨을 때 정말 감사했어요. 평생 잊을 수 없을 거예요. 지금도 '수상한 삼형제'의 모든 순간이 다 생생하네요. 다시 불러만 주신다면 그때보다 더 노련해진 연기 보여드리고 싶어요."
▲ "'쌍둥이들', 운명"
애당초 배우가 꿈이 아니었다. 데뷔 전 한양대 연극영화과 재학 시절 오지은의 관심은 연기가 아니라 연출이었다.
'베스트 블로거'라는 졸업 작품 연출 중이었다. 인터넷을 통한 훔쳐보기의 폐해를 지적한, 당시로서는 굉장히 선견지명적 작품이었다. 넘치는 의욕에 작품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근데 어느 날 학교에서 지나가는데 누군가 "지은아" 하고 불러 세운다. 마찬가지로 졸업 작품 준비하던 선배였다. 여배우 섭외가 안 돼 괴로워하던데, 갑자기 자기 영화에 출연해달라고 제안한다. '왠지 지은이라면 할 수 있지 않을까' 했단다. "전 못해요" 거절했다. '베스트 블로거' 준비가 당장 발등의 불인데, 게다가 연기라니.
오지은은 단호한 성격이 못됐다. 무심코 '읽어나 볼까' 하고 대본을 본 게 문제였다. '이건 내 작품 미루더라도 꼭 해야만 해!'
그렇게 선배의 영화에 출연했다. 연출 공부하느라 학교에서 연극 해도 주인공은 늘 다른 사람 몫이었다. 그런데 덜컥 여주인공에 그것도 쌍둥이 역. 상대 배우는 박혁권 오빠. 여자친구에게 결별 통보 받은 남자가 여자친구를 만나러 왔다가 여자의 쌍둥이 언니를 만난다는 내용의 멜로였다. 대본 읽었을 때의 마음을 새기고 즐겁게 촬영했다.
그때 찍은 작품이 독립영화 '쌍둥이들'이었다. 오지은의 감독 선배는 2007년 미쟝센영화제에서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부문 최우수작품상을 받았다. 박혁권이 심사위원 특별상 연기부문을 받았다. 그리고 같은 부문 트로피를 오지은 역시 거머쥐었다. 이후 여러 기획사와 감독들의 관심이 쏟아졌고, 그게 오지은의 배우 인생 시작이었다.
"저에겐 운명 같은 작품이에요. '쌍둥이들'이 없었다면 연기할 생각은 전혀 못했을 거예요."
오지은을 캐스팅한 감독 선배가 개봉 예정작 '내 심장을 쏴라'의 문제용 감독이다. 문 감독의 첫 장편 데뷔작이다. "전 '쌍둥이들' 덕분에 좋은 일들이 많이 생겼는데, 훌륭한 선배는 오랫동안 준비해서 이제 나오게 됐어요. 저나 혁권 오빠는 '쌍둥이들'로 좋은 영향을 많이 받았거든요. 재용 오빠가 이번에 꼭 잘돼서 많은 분들이 영화를 봤으면 좋겠어요. 연출이 워낙 섬세하거든요."
▲ '지은(知恩)'
오지은은 고마운 사람이 많았다. 이름은 '知(알 지)'에 '恩(은혜 은)'이다. "이름이 중요하지 않나요? 그 의미대로 산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어줬던 사람들을 잊지 못한다. 진형욱 PD, 문영남 작가가 그렇고 문제용 감독도 마찬가지다. 얼마 전 끝낸 MBC 드라마 '소원을 말해봐'의 박언희 작가도 잊을 수 없는 고마운 사람이다.
"저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셨던 분들이 항상 마음속에 있어요. 힘들고 지치고 다 놓고 싶을 때마다 생각해요. '날 믿어준 작가님이 계시고, 감독님이 계시니까' 하고요. 꼭 갚아야 할 게 있잖아요. 저 절대 안 잊을 테니까, 저한테 많이 베풀어주실 거죠?"
[배우 오지은. 사진 = 송일섭 기자 andlyu@mydaily.co.kr]
이승록 기자 roku@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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