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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데일리 = 곽명동기자]“목욕탕 신은 제가 찍은 102편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거장의 눈빛은 빛났다. 목소리는 밝았다. 표정은 온화했다. 그가 100편이 넘는 영화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라고 확신할 때, 객석은 박수로 화답했다.
지난 3일 오후 8시 광화문 시네큐브에서 영화 ‘화장’의 임권택 감독과 정성일 평론가의 GV가 열렸다. 임권택 감독이 단상에 오르자 270여명의 관객은 일제히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김훈의 동명 소설을 스크린에 옮긴 ‘화장’은 죽어가는 아내(김호정)와 젊은 여자 추은주(김규리) 사이에 놓인 화장품 회사의 중역 오상무(안성기)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임권택 감독은 김훈 소설의 문장 앞에서 아득했다. 견고하고 단단한 문장을 뚫고 들어갈 자신이 없었다.
“‘내가 수렁에 들어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죠. 사실감을 놓치면 관념으로 흐를 위험이 있었습니다. 사실감을 극의 힘으로 끌고가는 게 목적이었습니다. 사실감을 가장 감동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장면이 목욕탕 신이었어요. 죽어가는 부인의 모든 고통을 한꺼번에 드러내게 해서 설득력 있게 보여주자고 결심했죠. 100여편의 영화 중에서 가장 잘 찍힌 장면이었습니다. 자랑하고 싶은 장면이예요.”
암으로 죽어가는 부인 역을 맡은 김호정은 대소변을 가리지 못해 치부를 드러내며 남편의 도움을 받아야하는 고통과 절망의 연기를 빼어나게 소화했다. 당시 촬영장에 있었던 정성일 평론가는 “임권택 감독님이 김호정 씨에게 모니터를 보여주며 ‘내가 찍은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다’라고 말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봤다”고 말했다
‘화장’은 임권택 감독의 102편의 필로그라피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동안 조선시대, 일제 강점기, 해방전후, 한국전쟁, 70년대 등을 시대배경으로 찍은 영화가 대부분이었다. 현재의 삶 속을 파고든 영화는 ‘화장’이 유일했다.
“100여편을 찍으면서 ‘임권택 영화답다’는 형식이 만들어졌어요. 판소리를 포함해서 한국인의 문화적 개성을 담아오다보니까 스스로 지쳤습니다. 여기서 빠져나오지 못하면 감독의 활력을 찾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김훈 소설을 읽으면서 이 작품이라면 내가 기왕에 해왔던 것에서 빠져나올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임권택 감독은 “영화란 감독이 살아온 세월이 누적이 되고, 발효가 돼서 드러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화장’은 팔순 노인에 이르러 바라본 세상인데, 젊은 관객들이 나의 세상보기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다고 했다.
‘임권택 영화학’의 최고 전문가인 정성일 평론가는 “‘화장’은 팔순의 거장 감독이 보여주는 새로운 경지의 영화”라고 설명했다.
“이 영화에선‘산다는 것의 사실감’이 우리를 멈칫하게 만듭니다. 장면과 장면 사이가 너무 깊어서 마치 떨어져 길을 잃어버릴 것만 같습니다. 삶의 너비가 아니라 깊이를 생각하면서 영화의 감흥을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사진 위 임권택 감독, 아래 정성일 평론가. 제공 = 명필름]
곽명동 기자 entheos@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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