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구/NBA
[마이데일리 = 김진성 기자] “지면서 배웠다.”
모비스 유재학 감독은 사령탑으로서 이룰 건 거의 다 이뤘다. 2004-2005시즌 모비스 지휘봉을 잡은 뒤 정규시즌 우승 5회, 챔피언결정전 우승 5회를 일궈냈다. 통합 챔피언도 올 시즌을 포함해 3회를 달성했다. 지난해엔 인천 아시안게임 대표팀을 맡아 12년만에 한국에 금메달을 안기기도 했다. 그는 누구보다 한국농구에서 최후의 승자로 많이 기록된 사령탑이다.
유 감독은 부상으로 현역을 20대 후반에 접었다. 짧은 전성기를 누렸지만, 당대 최고의 포인트가드였다. 머리가 비상하고 영리한 플레이를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연세대 코치를 시작으로 대우 코치를 거쳐 30대 후반 대우(현 전자랜드) 사령탑에 올랐다. 아직 한국나이 53세인데 지도자 경력은 20년이 넘었다. 경험에서 나오는 노련한 용병술과 선수단 장악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때문에 적어도 현재 국내에선 유 감독을 벤치싸움에서 이길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만수도 좌절할 때가 있었다
유 감독은 “어느 순간 ‘KBL 농구는 이런 특색이 있구나. 국제대회서는 먹히지 않지만, 국내에선 이런 게 통하는 구나’라는 걸 느꼈다”라고 털어놨다. 프로 원년부터 단 한 시즌도 쉬지 않고 현장에 있었던 유일한 지도자다. 장기레이스, 플레이오프를 치르는 남다른 노하우가 있다. 그는 구체적으로 밝히는 걸 꺼렸다. “지고 울면서 비싼 값 치르고 배운 것이다. 쉽게 말할 수 없다”라고 웃었다.
지금은 유 감독을 ‘만수’라고 부른다. 그러나 유 감독도 초짜 감독일 때가 있었다. 그는 사석에서 과거 대우, 신세기, SK 빅스 시절 얘기를 종종 한다. 대부분 깨지고 좌절했던 얘기다. 유 감독은 “용병 잘못 뽑아서 고생도 해봤고, 트레이드를 잘 못하는 바람에 트레이드 무서운 것도 깨달아봤다”라고 털어놨다.
벤치싸움 역시 마찬가지. 지금도 유 감독이 떠올리는 결정적 순간이 있다. 2001-2002시즌 LG와의 6강 플레이오프 1차전. LG 외국인선수 2명이 모두 5반칙 퇴장 당했다. 유 감독은 “상대가 스몰라인업으로 나왔다. 나도 얼 아이크(주전센터)를 뺐다”라고 회상했다. 결국 유 감독의 SK 빅스는 LG에 4강 플레이오프 티켓을 넘겨줬다. 유 감독은 “내 화투패만 보고 상대 화투패는 보지 못한 꼴”이라고 했다. 상대가 스몰라인업으로 나올 때 아이크를 활용, 높이 강점을 극대화했어야 했다는 게 유 감독의 아쉬움.
이후에도 시련은 많았다. 전자랜드를 2003-2004시즌 처음으로 4강 플레이오프로 올려놓기 전까진 패배의 역사가 훨씬 많았다. 2004-2005시즌 모비스로 옮기면서 본격적으로 명장의 길을 걸었다. 이때부터 각종 전술전략을 폭넓게 고안했고, 선수단 장악의 달인이 됐다. 물론 그 와중에도 부침을 많이 겪었다. 전반적으로는 사령탑 초년병 시절 고생을 많이 했던 게 결국 오늘날 ‘만수’로 재탄생한 원동력임을 부인할 수 없다.
▲젊은 감독들에게 남긴 조언
국내 농구판에는 특색이 있다. 남녀 모두 구단들이 유독 젊은 감독을 선호한다는 점이다. 모기업 이미지를 젊고 세련되게 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결국 구단 수뇌부가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현장을 조종하고 싶기 때문. 특히 최근 몇 년간 그런 양상이 두드러진다. 이런 현상의 피해자는 젊은 감독들 자신. 구단은 젊은 감독을 한번 써보고 성적이 좋지 않을 경우 가차없이 다른 감독으로 갈아치우기 때문이다. 결국 젊은 감독들이 프로 지도자로 살아남기 위해선 현역 시절 그 이상의 피나는 노력이 필요하다.
유 감독이 대표적인 성공 케이스다. 적어도 국내에선 누구도 그의 지도력을 의심하는 사람이 없다. 그는 충분히 젊은 지도자들에게 조언을 해도 될 정도의 커리어를 쌓았다. 유 감독은 “같이 현장에 있는데 그런 말을 하는 건 조심스럽다”라고 꺼리면서도 “젊었을 때 좋은 성적을 내면 그게 자기가 잘해서 그렇게 된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라고 했다.
유 감독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처음에 전력이 좋은 팀을 맡아서 성적을 내면 오해할 수 있다. 물론 팀 운영을 잘 한 것에 대해선 충분히 인정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위기관리능력은 검증되지 않은 것”이라고 날카롭게 지적했다. 최근 몇 년간 좋은 성적을 낸 젊은 감독들도 전력이 좋지 않을 때의 위기관리능력을 검증 받아야 진정한 명감독 대열에 들 수 있다는 것이다.
▲냉철한 농구시야
숱한 실패를 맛본 유 감독의 농구 시선은 냉정하고 날카롭다. 본질을 정확히 꿰뚫는다. 뜬구름 잡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가 이번 챔피언결정전에 들어가기 직전 김주성과 윤호영의 체력이 떨어졌기 때문에 4승1패를 예상한 건 자만을 한 것도 아니었고, 상대를 무시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동부의 본질을 정확히 간파한 것이었다.
실제 유 감독은 “만약 4강에서 오리온스를 만났으면 챔프전도 올라오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라고 했다. 지난해 LG와의 챔피언결정전 도중에도 수 차례 “제퍼슨은 정상적으로 막을 수 있는 선수가 아니다. 저 선수가 우리가 준비한 것 이상으로 잘하면 우승 못하는 것”이라고 냉정하게 말했다. 심지어 유 감독은 “2005-2006시즌 삼성에 챔프전서 0-4로 졌다. 하나도 억울하지 않다. 당시 멤버 자체가 삼성에 상대가 되질 않았다. 당시 우리 멤버로 정규시즌 우승도 대단한 것”이라고 했다.
유 감독의 모비스는 통합 우승 감동을 뒤로 하고 리빌딩에 돌입한다. 멤버 구성상 그럴 때가 됐다는 게 유 감독의 설명. 문태영이 FA로 풀리고 양동근과 함지훈의 나이가 적지 않다. 모비스를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에 내릴 수 있는 결정. 구단도 5년이란 시간을 부여하며 유 감독을 신뢰했다.
‘만수’라는 별명은 그냥 붙여진 게 아니다. 처절한 노력과 숱한 패배 속에서 냉정할 정도로 정확히 꿰뚫는 ‘농구 시야’가 생겼다. 탐 난다고 해서 1~2년만에 생기는 게 아니다. 노력과 연구를 등한시하는 일부 지도자들, 정치력에 편승해 명맥을 이어가려는 일부 지도자들은 유 감독의 성공을 보고 뼈저리게 반성해야 한다.
[유재학 감독. 사진 = 원주 송일섭 기자 andlyu@mydaily.co.kr]
김진성 기자 kkomag@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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