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마이데일리 = 포항 김진성 기자] "박수를 쳐주는 건 좋은 것 같습니다."
삼성 이승엽의 400홈런이 임박하자 삼성을 상대하는 팀들의 속앓이도 만만치 않았다. 상대 입장에선 이승엽에게 400홈런을 맞는 게 유쾌할 리 없었다. 2~4일 포항 삼성전을 맞는 롯데로선 부담이 컸다.
내색할 수는 없었다. 팬들은 정정당당한 승부를 원했다. 5월 31일 LG가 잠실 삼성전서 사실상 승패가 결정된 상황서 이승엽을 피하는 듯한 모양새를 드러내자(물론 LG는 고의사구가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팬들의 엄청난 비난에 시달렸다.
최근 KBO리그는 급격히 차가워졌다. 빈볼, 사인 훔치기 논란, 선수에게 공 던지기 등 야구 외적으로 오해를 하거나 대립각을 세우는 일이 부쩍 늘어났다. 롯데는 어떻게든 논란 혹은 오해 없이 삼성전을 치르고 싶었다. 결과적으로 롯데는 이승엽 400호 홈런의 희생양이 됐다. 하지만, 그들이 보여준 자세는 프로페셔널 그 자체였다. 400호 홈런의 희생양이 아닌 멋진 파트너였다.
▲황재균의 이색공약
3일 경기 전 롯데 덕아웃에선 "이승엽이 400홈런을 치고 그라운드를 돌면 황재균이 하이파이브를 할 수 있다"라는 말이 들렸다. 황재균은 롯데 3루수. 이승엽이 홈런을 치면 3루수 황재균 옆에서 3루 베이스를 밟고 홈으로 들어가게 돼 있다. 황재균은 그때 대선배를 축하하는 차원에서 하이파이브를 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결과적으로 황재균과 이승엽은 하이파이브를 하지 못했다. 홈런을 친 타자와 상대 야수의 하이파이브. 전례 없는 일이다. 사실 야구규약상 경기 도중 양팀 선수들의 친교행위는 금지된다. 타자가 1루에 출루한 뒤 1루수와 서로 살짝 웃으며 가볍게 인사를 하는 경우는 있지만, 과하지 않은 수준에서 용인될 뿐이다. 롯데 관계자에게 확인한 결과, 이승엽이 3루 베이스에 도달했을 때 황재균은 모자를 벗고 이승엽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고, 이후 박수를 쳤다. 이승엽은 황재균 대신 김재걸 3루 베이스 코치를 바라보며 기뻐했다.
어쨌든 황재균이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다. 그만큼 대선배를 존경한다는 의미가 담겨있기 때문. 이종운 감독도 "그 정도는 괜찮은 것 아닌가. 하이파이브가 아니라면 가볍게 엉덩이를 한번 툭 치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라고 했다. 이 감독은 이미 2일 경기를 앞두고 "이승엽에게 홈런을 맞는 투수도 그 자체로 역사"라며 쿨하게 반응했다. 그는 대기록은 다함께 존중하고 축하해줘야 한다는 생각이다. 롯데는 그걸 제대로 보여줬다.
▲3루 덕아웃 앞에 도열한 롯데 선수단
이승엽의 400호 홈런이 터진 건 3회말이었다. 삼성 구단은 3회말 공격이 끝나자마자 1루 덕아웃 앞에서 간단한 시상식을 거행했다. 김인 사장, 류중일 감독, 주장 박석민이 차례대로 나와서 이승엽에게 꽃다발을 전달했다. 롯데도 주장 최준석이 꽃다발을 갖고 1루 덕아웃 앞으로 걸어오더니 이승엽에게 정중하게 전달했다. 상대 팀이지만, 대기록을 축하한다는 의미. 여기까진 대기록 세리머니 때 흔히 볼 수 있는 일. 이미 정해진 수순이기도 했다.
정작 놀라운 건 이승엽이 1루 덕아웃 앞에서 꽃다발을 받고 세리머니를 할 때 롯데 선수단도 3루 덕아웃 앞에 도열했다는 사실. 전례 없는 일이다. 롯데는 4회초 공격을 앞둔 상황서 선두타자로 타석에 들어설 타자, 대기타석에서 스윙을 연습할 타자 외에는 굳이 선수가 그라운드에 나올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롯데 선수들은 이승엽의 세리머니 때 모두 3루 덕아웃 앞으로 나와 도열했다. 그리고 세리머니 내내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대기록의 희생양이 돼 자존심이 상할 법도 했지만, 오히려 상대의 대기록을 축하하며 자신들의 품격도 높였다. 진정한 동업자 정신이 무엇인지 증명하는 좋은 사례.
▲한번 더 감동받은 이승엽
이승엽도 알고 있었다. 꽃다발을 다 받고 1루 관중석의 팬들에게 인사한 뒤 몸을 180도 돌려 3루 덕아웃 앞에 도열해 박수를 치는 롯데 선수들을 바라봤다. 그 역시 롯데 선수들에게 화답하는 의미로 90도로 고개를 숙였다. 대부분 자신의 야구 후배들이지만, 대기록 앞에서 선, 후배는 의미 없었다. 이날 3회말과 4회초 사이 포항구장은 진심으로 이승엽을 축하하기 위한 시간, 그리고 이승엽이 보답하는 시간이었다.
이승엽은 "솔직히 우리나라는 상대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 우리는 선수가 원정지에서 기록을 세웠을 때 전광판에 띄워주지도 않는다. 일본은 그렇지 않다"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내 "롯데 선수들이 덕아웃 앞에 나와서 박수를 쳐준 걸 봤다. 주장은 따로 꽃다발까지 줬다. 롯데 선수들과 관계자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 드린다"라고 했다.
▲자존심 지킨 이종운 감독
롯데도 자존심을 지켰다. 이 감독은 경기 전 "선수들은 박수도 쳐줄 수도 있고 엉덩이를 두드려 줄 수도 있다. 하지만, 감독이 나가서 박수를 쳐주고 축하해주는 건 좀 아닌 것 같다"라고 했다. 대기록은 축하할 일이지만, 엄연히 경기 중이고 롯데는 삼성과 싸우는 상대 팀. 이 감독은 "나는 우리 선수들의 대장이다. 나까지 나가서 상대 선수의 대기록 달성에 같이 좋아하는 건 좀 그렇다"라고 선을 그었다.
대신 이 감독은 다음 날 이승엽의 대기록을 따로 축하해줄 용의가 있다고 했다. 일찌감치 투수들에게 이승엽 400홈런을 맞는 걸 부끄럽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강조했던 이 감독이다. 하지만, 이 감독은 상대의 대기록을 축하하면서도 롯데의 자존심을 지키는 동시에 롯데 팬들을 향한 최소한의 배려도 잊지 않았다. 롯데 팬들 입장에선 이승엽에게 400홈런을 맞은 게 유쾌하지 않을 수 있다. 롯데 팬들에게 굳이 감독까지 상대 선수에게 박수를 치는 모습을 보여줄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위에서부터 이승엽과 최준석, 황재균, 롯데 선수들, 이종운 감독. 사진 = 포항 송일섭 기자 andlyu@mydaily.co.kr]
김진성 기자 kkomag@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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