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마이데일리 = 허설희 기자] '나는 득보 사랑허재~', '나도 수국이 사랑허재'
서로 사랑하고, 그 마음을 숨기지도 않는데 이뤄지지 못한다. 참 예쁜 사랑인데 안타까움에 눈물이 난다. 사랑 뿐만이 아니다. 그 시대 모두의 상황이 참 슬프다. 그럴 수밖에 없다. 뮤지컬 '아리랑' 속 인물들은 일제강점기, 슬프고 아픈 시대를 살아내고 있다.
뮤지컬 '아리랑'은 천 만 독자에게 사랑 받은 작가 조정래의 대하소설을 뮤지컬화 한 작품. 일제강점기, 파란의 시대를 살아냈던 민초들의 삶과 사랑, 투쟁의 역사를 그린다. 신시컴퍼니가 지난 2007년 '댄싱 섀도우' 이후 8년의 공백을 깨고 야심 차게 준비한 대형 창작뮤지컬로 광복 70주년을 맞는 올해 공연돼 더 의미있는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12권의 장편 소설을 2시간 40분 작품으로 새롭게 탄생시킨 뮤지컬 '아리랑'은 방대한 양이지만 핵심만을 짚어내며 그 어떤 인물도 그저 지나치지 않았다. 감골댁 가족사를 중심으로 굵직굵직한 이야기가 펼쳐지는 가운데 버려지는 인물이 하나도 없다.
물론 이야기 주축을 이루는 인물들이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에게만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그 시대 민초들의 이야기를 그리는 만큼 모든 인물에게 세심하게 시선을 쏟았다. 우리 민족의 아픔과 상처를 그리지만 이들의 투쟁 정신이 돋보인다. 그 투쟁 정신으로 '어떻게든' 살아가고, 그 삶 속에서 '어떻게든' 서로를 보듬고 자신을 지키는 우리 민족의 힘이 드러난다.
혼란스러운 시대인 만큼 '아리랑'에는 다양한 인물이 존재한다. 인고의 어머니상 감골댁,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감골댁의 아들 영근, 고난과 유린의 세월을 한국여인의 강인함으로 감내하는 수국, 그런 수국을 사랑하는 우직한 득보, 가족과 이웃을 위해 한스러운 인생을 스스로 살고자 하는 득보의 동생 옥비, 잘못된 선택으로 악인이 되어버리는 양치성, 이들을 모두 아우르며 나라의 독립을 위해 애쓰는 의식 있는 양반 송수익. 그리고 이들과 함께 수난의 나날들을 함께 하는 이웃들이 있다.
고통스러운 시대, 다양한 인물 만큼이나 한 많은 이야기가 존재한다. 자유는 커녕 자신이 하고싶은 말을 할 수도, 자신의 뜻대로 행동할 수도 없는 시대를 사는 이들의 이야기는 참 아프다. 실제 우리 민족이 지나온 역사를 그리기에 그 아픔은 관객들에게도 더 와닿는다.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지조를 지키고 산다는 것이 이토록 어려운 것인가, 참 비통하다.
비통하고 또 비통한 삶이 계속된다. 외면해서는 안 되는, 그럼에도 너무 비통해 버티기 힘들고 괴로운 이들의 삶이 빠른 전개에 힘입어 흡인력 있게 스며든다. 그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민족의 아픔이 처절하게 그려지는 것이다.
하지만 뮤지컬 '아리랑'은 불편하지 않다. 물론 슬프고 아프다. 그러나 극 중 인물들은 그럼에도 '어떻게든' 살고자 한다. 그 어떤 시련 속에서도 아픔을 흥으로 승화시키고 스스로를 치유하려는 의지가 있는 것이다. 우리 민족 고유의 음악인 '아리랑' 속엔 우리 민족의 애환이 담겨 있지만 춤도 추고, 웃고 떠들며 그 아픔을 다시 살고자 하는 의지로 바꾼다.
고선웅 연출 역시 연출 의도에 대해 "'애이불비'다. 슬프지만 슬프지 않다. 속으로는 슬픈데 겉으로는 슬프지 않다고 잡았는데 모토는 애통하지만 카타르시스가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밝혔다. 고선웅 연출의 뜻대로 극중 인물들의 삶은 애통하지만 굳건함으로 모든 아픔을 딛고 일어서며, 그 안에서 카타르시스를 찾는다. 이 때 우리가 가져야 할 희망이 보인다. 눈물이 흐르지만 그 눈물을 닦고 그들의 뜻을 따라 '어떻게든' 살아내야 한다는 의지가 관객들에게도 생긴다.
이는 연극 '푸르른 날에', '칼로막베스', '변강쇠 점 찍고 옹녀' 등으로 특유의 연출력을 발휘한 고선웅 연출의 역할이 크다. '아리랑' 역시 고선웅 연출이 전작에서 선보였던 치유 방식이 돋보인다. 갑작스러운 과장된 몸짓이나 엉뚱함으로 웃음을 주는 형식은 관객들로 하여금 아픔에 허우적대지 않게 한다. 무조건 눈물을 빼는 것이 '아리랑'이 전하려는 의도는 아님이 여기서 느껴진다.
고선웅 연출은 적재적소 웃음 코드를 넣어 '아리랑'의 진정한 의미를 표현해낸다. 힘든 삶 속에서도 웃음을 되찾고, '아리랑'을 부르며 아픔을 승화시킨 우리 민족의 뜻이 이 엉뚱한 웃음을 통해 전해지기도 하는 것이다.
사실 무방비 상태에서 웃음이 터져버렸을 때 관객들은 다소 죄책감을 느끼기도 한다. 갑작스러운 웃음 코드로 인해 나도 모르게 웃어버린 이후 사실은 극중 인물이 놓여있는 현재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알아채게 되는 것. 이는 아픈 시대를 살아내며 우리 삶의 터전을 지켜준 과거 조상들을 잊고 살아온 현재 나의 모습을 되돌아 보게 하기도 한다. 웃음 속에 아픔이 더 극대화되고, 그 과정에서 깨달음이 생기는 것이다.
고선웅 연출 의도에 맞게 작품에 대한 애정으로 무대 위에서 모든 것을 쏟아내는 배우들도 인상적이다. 특히 수국 역 윤공주는 인생 배역을 만난듯 하다. 제작발표회에서부터 작품에 대한 애정으로 눈물을 보였던 윤공주는 무대 위에서 그 눈물의 의미를 전한다. 모든 것을 잃었지만 끝까지 득보를 향한 마음을 지킨다. 마지막까지 자신을 위해, 또 우리를 위해 살아낸다.
윤공주를 통해 인내하면서도 표출하고, 울부짖으면서도 다시 살고자 하는 수국의 강인함이 무대 위에서 완벽하게 전해진다. 큰 무대 위, 작은 몸짓이지만 그녀의 세세한 감정이 관객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지니 '아리랑'을 보는 내내 관객들도 그 감정을 함께 한다.
김우형의 양치성 역시 악역이지만 무작정 미워할 수 없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나라를 믿지 못하게 되면서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되기 때문. 물론 그 선택은 벌 받아 마땅하지만 순수한 마음까지 짓밟히면서 나라를 잃고, 사랑을 잃고, 결국 자신마저 잃어버리는 그의 삶이 참 안쓰럽다.
"눈물과 애국심을 강요하지 않고 그저 그 아픈 시절을 살아갔던 사람들이 살아내고, 살아갔던 이야기들을 무대 위에서 펼쳐보인다"고 밝혔던 그의 말대로 아픔 속에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
송수익 역 서범석은 처참한 상황 속에서도 아픔을 아우르며 극의 중심을 잡는다. 극중 인물들을 아우르지만 특별하게 튀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그 자리에서 민족 의식을 표현할 뿐이다. 감골댁 역 김성녀 또한 무대 위에서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 우리 민족의 한(恨)을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그려낸다. 김성녀와 함께 민요 및 판소리로 그 아픔을 더욱 극대화시키는 옥비 역 이소연 또한 눈에 띈다.
뮤지컬 '아리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극중 인물들이다. 누구 하나 슬프지 않은 인물이 없고, 누구 하나 기억나지 않는 얼굴이 없다. 앙상블의 힘이 그만큼 크다는 것이다. 이들의 웃는 모습, 우는 모습,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 등 다양한 표정이 '아리랑' 자체가 되고, 그들의 굵은 땀이 곧 작품에 대한 애착으로 다가온다. 얼마나 온 마음을 다해 작품 안에서 살고 있는지 관객들 눈에 그대로 보인다. 그들 모두가 주인공이듯 우리 모두가 주인공이라는 것 역시 앙상블을 통해 전해진다.
뮤지컬 '아리랑'은 그저 이야기로만 승부하지 않는다. 관객들의 눈과 귀를 모두 사로잡을만한 기술력도 내세운다. 다소 단순한 무대는 트레블레이터와 LED 조명 등을 통해 화려해진다. 박동우의 무대디자인, 영국 조명디자이너 사이먼 코더의 조명, 고주원의 영상디자인이 우리 민족 특유의 분위기를 만들어내면서도 세련됨을 잃지 않는다. 다양한 영상으로 감정이 표현되니 놓쳐서는 안된다.
안무가 김현은 역동적인 우리 민족을 표현했고, 의상디자니어 조상경 특유의 섬세함이 우리 민족의 얼을 배가시켰다. 훈춘사건, 경신참변 등 일련의 사건이 다양한 장치를 통해 각기 다른 안무로 표현돼 시선을 사로잡는다.
작곡은 '화선 김홍도', '템페스트' 등 대표적인 한국 뮤지컬들과 수많은 국악작품들에서 명성을 얻은 작곡가 김대성이 맡았다. 그의 음악 역시 또 하나의 이야기로 다가온다. 생동감 있는 음악은 우리에게 익숙한 '아리랑'을 중심으로 풍부하게 표현된다. 애달프면서도 역동적인 음악은 한국적이고 섬세하다. 가사 없이 '아'로만 표현되는 각 인물들의 울부짖음 역시 관객들을 집중하게 만든다.
뮤지컬 '아리랑'은 극중 인물들의 아픔과 치유를 통해 관객들에게도 치유와 해소를 선사한다. 아픔을 그대로 전하지만 그 상처를 함께 보듬어주는 장을 마련해주니 함께 울고, 함께 치유할 수 있다. 그 시대, 아픔을 딛고 일어선 그들처럼 우리도 함께 일어설 수 있게 해준다.
뮤지컬 '아리랑'. 공연시간 160분. 오는 9월 5일까지 서울 강남구 LG아트센터. 문의 02-577-1987.
[뮤지컬 '아리랑' 공연 이미지. 사진 = 신시컴퍼니 제공]
허설희 기자 husullll@mydaily.co.kr
- ⓒ마이데일리(www.mydaily.co.kr).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
댓글
[ 300자 이내 / 현재: 0자 ]
현재 총 0개의 댓글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