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마이데일리 = 곽명동 기자]박혁지(43) 감독은 고교 시절, 황인뢰 PD의 드라마 ‘천사의 선택’을 보고 영상 연출을 동경했다. 극본은 주찬옥, 음악은 송병준이 맡았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최고 역량의 예술가들이 빚어낸 작품이었다. 그의 잠재의식 속에는 아름다운 영상으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서정적인 음악으로 감정을 전달하고 싶은 열망이 꿈틀댔다. 영화 ‘춘희막이’는 그의 오랜 열망이 탄생시킨 작품이다.
‘춘희막이’는 본처와 후처라는 결코 가까워질 수 없는 사이이지만 46년을 함께 살았고 이제는 인생의 마지막, 곁에 남은 유일한 사람이 된 큰댁 막이 할매와 작은댁 춘희 할매의 실제 이야기를 담았다.
영화가 시작하면 세 대의 유모차가 나란히 서 있는 한적한 시골풍경이 펼쳐진다. 카메라는 움직이지 않고 기다린다. 경운기가 느릿한 움직임으로 프레임 왼쪽으로 빠져나간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 세 대의 유모차 중 한 대가 조금씩 움직인다. 천천히 굴러가던 유모차는 논두렁으로 떨어진다.
“앞으로 전개될 ‘춘희막이’의 호흡을 보여주는 거죠. 긴장감을 유발하는 효과도 있어요. 해외영화제를 염두에 뒀는데, 유럽인들은 유모차에 아기가 타고 있을까봐 가슴을 졸이더라고요. 할머니들의 손수레 역할을 한다는 생각을 못하는거죠.”
태풍과 홍역으로 두 아들을 잃었던 마흔 세 살의 최막이 씨는 조금은 모자란 처자를 데려오면 같이 살겠다 싶어 스물 네 살의 김춘희 씨를 데려왔다. 김춘희 씨는 아들 둘, 딸 하나를 낳았다. 당시 대부분의 씨받이가 아들을 낳으면 돌아갔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두 분은 19살 차이예요. 본처와 후처의 관계도 있지만 어머니와 딸, 언니와 여동생, 그리고 나이차가 나는 친구 사이일 수도 있죠. 두 분의 관계를 규정할 수 있는 언어는 존재하지 않을 거예요. 굳이 택하라면, 어머니와 딸의 관계에 약간 더 가깝지 않을까 싶어요. 막이 할머니를 위해 생선을 발라주고, 머리를 빗겨주고, 옷매무새를 만져주는 모습 등은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게 해요.”
2009년 2주간의 촬영으로 방송 프로그램을 만든 적이 있다. 아쉬웠다. 더 중요한 이야기가 있을 것 같았다. 두 할머니의 허락을 받아 인근에 방을 얻어 촬영을 시작했다. 처음 6개월 동안 일상생활의 연속이었다. 힘든 고비였다. 영화로 만들기엔 너무 평범했다. 자신감이 없어지고 서서히 지쳐갈 무렵, 막이 할머니가 춘희 할머니를 불러놓고 돈 세는 법을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온 몸에 전율이 일었다.
“속으로 깜짝 놀랐죠. 막이 할머니 입장에서는 모순된 행동이예요. 뭘 가르치든 하나마나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분이거든요. 그런데 안 될 걸 뻔히 알면서 가르치더라고요. 그 점이 놀라웠어요. 사랑스러웠고요.”
막이 할머니는 세상을 먼저 떠나면 홀로 남게될 춘희 할머니를 위해 힘든 농사일로 하면서 돈을 모으고 있다. 돈이 없으면 양로원에서 설움을 받을 것이라고 걱정했다. 춘희 할머니가 혼자 살림을 하기 위해선 돈의 개념을 가르쳐야했다. 이 장면은 ‘춘희막이’ 서사의 기폭제가 됐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가 떠올랐어요. 먼저 떠나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비디오 작동법을 가르치잖아요. 비슷한 상황이 제 눈 앞에서 벌어진 거예요. 막이 할머니의 진심이 전달되지 않는 막막함도 있죠. 춘희 할머니는 돈을 배우지 않겠다고 벽을 쳤고요. ‘왜 나한테 맡기지? 계속 살던대로 살아요’라는 느낌이 묻어났거든요. 그런 외침이 표정으로 전달됐어요.”
이 영화의 모든 쇼트는 ‘영화적’이다. 다큐는 입자가 거칠고, 영상이 흔들려야한다는 관객의 선입견을 무너뜨린다. 한 폭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영상이 끝까지 펼쳐진다. 해외 관객은 “촬영 현장이 편했나봐요?”라고 묻는다. 박혁지 감독은 다큐에 대한 상투성을 깨뜨리고 싶었다. 다큐도 얼마든지 영화처럼 아름다울 수 있다고 믿는다. 부지런하게 뛰어다니면서 가장 좋은 구도를 잡았다. 박혁지 감독은 180cm가 넘는 큰 키다. 반면 두 할머니는 키가 작고 허리도 굽었다. 위에서 내려찍는 부감이 아니라 수평 또는 아래에서 올려다보고 싶었다. 아이 레벨로 맞추기 위해 카메라를 다리 부근에 위치시켰다.
‘춘희막이’는 두 할머니가 유리창에 비치는 모습을 여러 가지 쇼트로 보여준다. 유리창 장면은 두 여인이 하나의 운명공동체임을 암시한다. 46년의 세월을 함께 하며 켜켜이 쌓여진 끈끈한 정을 유리창에 서로 비치는 모습으로 담았다.
박혁지 감독은 ‘춘희막이’의 촬영, 편집, 연출 등 1인 3역을 담당했다. 처음엔 영화 편집 경력자에게 맡겼다. 첫 장편영화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비교대상도 없었다. 잘 찍었는지 확신이 없었다. 이야기를 잘 만들 수 있을지도 반신반의했다. 그러나 원하는 편집본이 나오지 않았다. 직접 편집했다. 숱한 밤을 지새웠다. 맑고 깨끗한 두 분의 진심을 보여주는 데 중점을 뒀다.
이 영화의 음악은 국내 최고의 재즈피어니스트 김광민이 맡았다. 대학시절부터 김광민의 팬이었다. 진심을 담은 메일을 보냈고, 김광민은 흔쾌히 수락했다. 그는 박혁지 감독에게 음악이 들어갈 위치를 알려달라고 했고, 각 부분마다 두 가지의 선율을 들려줬다. 박혁지 감독이 마음에 드는 멜로디를 선택했다.
“두 할머니의 캐릭터가 음악으로 표현되길 원했어요. 김광민 선생님이 잘 살려주셨죠. 두 분 인생의 질곡과 묘한 애정과 따뜻함이 담겨있는 피아노 선율이예요. 김광민 선생님 특유의 서정적 멜로디가 마음에 들었어요.”
다음 작품도 우연치않게 두 여인의 삶이다. ‘시간’에 관한 이야기라고 했다. 캐릭터가 매력적이라고 귀띔했다. ‘춘희막이’ 개봉 뒤에 구체적으로 발전시킬 계획이다.
“‘워낭소리’와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가 다큐 시장을 키워놨지만, 여전히 부족합니다. 다큐는 아직까지 투자의 대상이 아니거든요. 다큐가 영화 산업의 한 분야로 당당하게 자리잡고 투자사들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춘희막이’가 다큐 시장이 커지는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길 바랍니다.”
[사진 = 유진형 기자 zolong@mydaily.co.kr]
곽명동 기자 entheos@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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