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마이데일리 = 허설희 기자] 어찌 보면 몽상가 같기도, 또 어떻게 보면 지극히 현실적이기도 하다. 한쪽에만 치우치지도 않는다. 순수하면서도 노련하고, 자연스러우면서도 계획적이다. 뮤지컬배우 김도빈은 타고난 끼를 적당히 조율하며 매력을 발산한다.
뮤지컬 '상자 속 흡혈귀'에서도 그렇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생계형 흡혈귀의 이야기를 적당히 조율하며 판타지와 현실을 자연스럽게 녹이고 있다.
불멸의 존재이자 루마니아의 로열 패밀리였던 뱀파이어 가족이 생계를 위해 한국의 어느 유원지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며 겪게 되는 에피소드를 담아낸 창작뮤지컬 '상자 속 흡혈귀'에서 김도빈은 우유부단한 몽상가이며 인간을 사랑하는 다정다감한 남자 흡혈귀 바냐 역을 맡았다.
김도빈은 "부담은 됐지만 공연을 올리고나니 행복하다. 그간의 작품과는 다르기 때문에 엄청 기대가 컸고, 대박이 날 것 같았다"며 작품에 만족해 했다.
그는 '상자 속 흡혈귀' 리딩 공연이 진행될 때부터 대본, 노래가 너무 좋다고 생각했다. 본공연이 올라간다는 소리에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이지호를 통해 이용균 연출과 만나 공연에 합류하게 됐다. 마침 이용균 연출은 서울예술대학교 연극과 시절 함께 술 한 잔 했던 직속 선배였고, 그래서 더 반가웠다.
처음 본 대본은 신선했다. 김도빈은 "흡혈귀들인데 병맛 코드도 있고, 결말이 너무 충격적인 반전 결말이어서 신선했다"며 "바냐란 캐릭터도 너무 매력적이었다. 모든 캐릭터들 감정이 끝까지 치닫게 되는 게 좋았고 도전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바냐는 로맨티스트, 몽상가예요. 흡혈귀는 불멸의 존재잖아요. 그래서 작은 아이들한테 감사해하고 행복해해요. 식물들, 동물들, 곤충들, 인간들에게도요. 인간들이 일생을 열심히 살다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죽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워 하면서도 동경하죠. 그래서 더 인간처럼 순간 순간 행복하게 살려고 해요."
최근 흡혈귀 이야기가 대세지만 '상자 속 흡혈귀'에서는 다르다. 섹시하고 치명적인 흡혈귀 대신 인간처럼 살기 위해 돈도 벌고, 자존심도 버리는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흡혈귀를 그린다. 그런데 그 속에서 바냐는 또 다르다. 철 없이 보일 수 있지만 '행복하게 살자'는 신념으로 현재를 즐긴다.
사랑도 그렇다. 인간을 사랑하게 되는 그는 순간의 감정에 충실할 뿐이다. "흡혈귀라는 게 되게 매력적인데 우리가 익히 알고 봐왔던 흡혈귀들도 사실은 인간과 다를 바 없다는 게 작품을 통해 그려진다"고 밝힌 김도빈은 "판타지적인 흡혈귀의 모습보다도 더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설명했다.
"우리 모두 흡혈귀를 직접 보진 못했잖아요. 전 상상으로 연기하고, 관객들도 상상으로 받아들이니 문제는 없죠. 그래서 인간을 무는 장면도 판타지지만 문제는 없어요. 오히려 더 공을 많이 들였죠. 사실 처음엔 진짜로 물지 않았어요. 상대 배우가 아플까봐.(웃음) 근데 상대 배우가 '무는거야? 입을 대는거야?'라면서 세게 물어야 느낌이 확 난다고 하더라고요. 자국나면 이상할텐데.. 그래도 물으라고 하니까 꽉 물고 있어요."(웃음)
판타지를 무대 위로 옮겼기 때문에 올 수도 있는 유치함, 어색함은 오히려 인물 자체에 집중하며 날렸다.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가 작은 것에 감사하지 못하고 살기 바쁜 부분에 집중했다. 모든 순간들이 아름답고 행복한 바냐의 본모습을 더욱 강조하려 했다.
"꽃이 피고 지고 밤에 별과 달이 뜨고, 이런 것들을 보면서 순간을 아름답게 보고 일생을 열심히 살아가야 하는데 우린 잘 그러지 못하잖아요. 휴가 때나 잠깐 어디 가고.. 그런 것들을 바냐는 하니까 더 여유롭게 살라는 메시지를 잘 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 역시 취미가 낚시인데 요즘 정말 못 갔어요. 가면 전라남도까지 가니까 시간을 못 냈죠. 가면 너무 행복해요. 강이 확 펼쳐져 있고 완전 그림이거든요. 그걸 보면서 '와, 너무 행복하다'라고 느끼죠. 지금은 공연하느라 1년째 못 가고 있는데 그렇게 아름다운 자연을 좋아하는 순수한 영혼이 바냐와 저의 닮은점 같아요."
연습 분위기도 좋다. 2010년부터 서울예술단에 몸담고 있는 그에게 외부 작품 '상자 속 흡혈귀'는 또 다른 새로움을 준다.
김도빈은 "서울예술단은 오래 해왔기 때문에 항상 좋은데 '상자 속 흡혈귀'는 오래 하지 않았는데도 분위기가 제일 좋았다"며 "사람들이 다들 착해빠졌다. 순수하고 재미있다"고 말했다.
"아는 사람은 (이)지호 말고는 없었어요. 그런데도 금방 친해질 수 있었죠. 서울예술단에서는 박영수, 조풍래와 눈빛만 봐도 어떻게 가야 할지 아는데 '상자속 흡혈귀'에서는 이지호, 김대곤과 그런 부분이 있어요. (이)지호는 느끼한데(웃음) 춤선이 정말 예쁘죠. 그런 부분을 많이 배웠고, (김)대곤이는 진짜 웃겨요. 고릴라 춤을 잘 추는데 연기적으로는 생 날것이 나오니까 좋죠. 다른 배우들도 너무나 순수해요. 작품적으로는 서울예술단과는 아무래도 많이 차이가 있는데 표현 방식이 달라 재밌었어요. 서울예술단에선 주로 대극장 공연을 하다 보니까 몸을 더 많이 쓰는데 소극장에서는 정말 미세한 표정 하나 하나 다 보이잖아요. 그래서 더 섬세한 감정을 낼 수 있어 재밌었어요. "
사실 김도빈은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해도 과언이 아닌 배우다. 안양예술고등학교에 서울예술대학교 연극과, 서울예술단 단원까지. 부모님 역시 두 분 모두 서울예술대학교 연극과 출신이다. 어린 시절에는 대금을 연주하길 바라는 부모님 뜻에 따르기 위해 단소를 불며 국악인을 꿈꿨다. 전국 콩쿨에서 1등도 하고 '단소 신동'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김도빈은 "사실 어릴 때는 탄탄대로였다. 국악계를 뒤집을 만한 신동이라고 했다"며 웃었다. 그러나 초등학교 졸업 후에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탄탄대로였던 국안인 꿈나무가 국악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것. 이후 단대부중 농구부에 들어가 농구선수를 꿈 꾸기도 했지만 늦게 시작한 만큼 어려움이 있었다.
"계속해서 안되고 힘들어 하니까 부모님이 예고에 가라고 했어요. 그렇게 안양예고 시험을 봤죠. 원래 뮤지컬을 할 생각은 없었어요. 노래를 그렇게 잘 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 시절엔 뭘 잘 몰라서 뮤지컬 연기도 싫었죠. 대학교 졸업하고 극단 생활을 3년 정도 했는데 고등학교 친구 (김)무열이가 뮤지컬 하는걸 봐왔어요. 정말 잘 하더라고요. 극단 생활을 하면서 돈을 한 번도 못 받았어요. 선배님과 같은 무대에 서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었고, 하나씩 배워가는 게 좋았죠. 그 때는 뭔가 대학로가 내 집 같았어요. 1번 출구 앞 건널목 건널 때 신발 벗고 건널 정도로 우리집 안방 같은 곳이었죠.(웃음) 그래서 돈을 안 받아도 좋았어요. 근데 뮤지컬 하는 친구들은 공연도 하고 돈도 받더라고요? '뭐? 돈을 준다고?' 하면서 얼떨결에 뮤지컬배우에 대해 알아봤죠."
처음부터 뮤지컬배우 꿈을 꾼 것은 아니지만 꿈을 꾸게 된 이후에는 전력을 다했다. 동영상을 찾아보면서 몰랐던 뮤지컬 매력을 알게 됐다. 친구와 함께 사는 집 벽에 계란판 붙여놓고 노래를 계속 부르면서 독학을 했다. 계속해서 연습했다. 막상 뮤지컬을 시작하려 하니 어린 시절 뮤지컬 연기를 싫어하고, 관심 없어 했던 자신이 한참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게 됐다. 이후에는 더 악착같이 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다.
간절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니 기회도 생겼다. 그룹 레슨을 함께 받던 친구들을 따라 서울예술단 오디션을 보게 됐고, 합격했다. 그 이후로 계속해서 서울예술단과 함께 했고 좋은 사람들과 함께 행복하게 연기하고 있다. 서울예술단 작품 뿐만 아니라 조금씩 외부 작품도 해나가면서 배우로서도 입지를 다지고 있다.
"배우에게는 나만의 기준이 되게 중요해요. 그게 없으면 큰일나죠. 나만의 뿌리가 있어야 흔들리지 않고 쭉 갈 수 있어요. 저는 제 자신을 믿는 게 커요. 뚝심이 있죠. 무대 위에서 다른 삶을 살아야 하는데 정말 비겁하지 않게, 진실되게 살아야죠. 그러기 위해 연습에 더 몰두하는 거고요. 제 장점이요? 전 두개가 다 되는 것 같아요. 선한 역과 악역을 오고갈 수 있어요. 서울예술단에서 하는 역할과 외부 작품에서 하는 역할이 많이 달라요. 서울예술단에서 좀 더 센 역할을 했다면 외부 작품에서는 좀 더 순수하고 소년 같은 역할을 하는 것 같아요. 그렇게 오고갈 수 있는 게 제 장점 같아요. "
뮤지컬 '상자 속 흡혈귀'. 공연시간 110분. 오는 12월 31일까지 서울대학로 SH아트홀. 문의 02)744-5442.
['상자 속 흡혈귀' 김도빈. 사진 = 곽경훈 기자 kphoto@mydaily.co.kr]
허설희 기자 husullll@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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